송전 한남대 명예교수·연출가 |
대전 연극과 인연 맺은 루마니아 한 소도시에서 매년 열리는 '바벨' 국제공연예술제에 올해 극단 <새벽>이 '만리향'을 갖고 참가했는데, 그들의 활동과 동유럽의 연극축제를 참관할까 어렴풋이 생각하다 인상 깊게 읽었던 한 독일소설 속의 도시 토미스가 루마니아의 해안도시 콘스탄챠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여행을 최종 결심했다.
토미스는 고대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대시인 오비디우스(BC43-AD17)의 도시이다. 그의 명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51세의 그는 70세의 아우구스트 황제(BC 63-AD 13)의 특명에 따라, 원로원의 어떤 토의도 또 어떤 사법절차도 없이 당시 세계의 끝 흑해 연안 토미스라는 벽지(僻地)로 유배되었다. 이후 로마제국 안에서 그의 모든 흔적은 지워졌다. 그는 자전적인 시에서 유배 원인을 '시'와 '실수' 때문이었다고 표현했다. 제국 창건자로서 사회규범을 엄정히 세우려던 존엄자 아우구스트 황제는, 자유분방한 사랑의 기법을 감미로운 시어로 담은 연작시집 <사랑의 기술>을 펼쳐 여인들 마음을 들뜨게 만든 시인이자 딸 쥴리아 연애하고 손녀 쥴리아를 부추기는 바람둥이 오비디우스를 마땅치 않아 했을 것이다.
갑자기 유배 죄인이 된 오비디우스는 <메타모르포세(변신)>라는 대서사시를 상당 부분 썼던 터였는데, 유배지에서 이를 완성했다. 작품에 뜨거운 자부심을 가졌던 그는 그때의 심정을 "나는 이제 한 작품을 끝내나니 오로지 나의 육체만을 지배할 뿐인 죽음은 이제 언제든 나의 여생을 끝내도 된다. 나는 나의 작품과 영속하겠고 별보다 더 높이 올라갈 것이며, 나의 이름은 그 어느 것도 파괴하지 않으리라"고 토로했다.
필자 마음에 각인된 오스트리아 현대 소설가 란스마이어의 출세작 <최후의 세계>는 "태풍. 그것은 밤하늘 높이 떠있는 새들의 무리였다. 떠들썩하게 요란을 떨며 점점 다가오다가 갑자기 거대한 파도로 변하여 배를 덮치는 태풍. (...) 태풍. 그것은 토미스로 가는 여행이었다." 라는 서술로 시작된다. 이 감흥을 담은 내 발이 디뎌진 곳.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의 이복 여동생 콘스탄챠 이름이 덧입혀진 신화의 도시 토미스에 발을 내딛는 순간 필자 마음속엔 태풍이 담겨있었다.
토미스 맞은편 흑해 동쪽 연안에 콜키스 왕국이 있었다. 이 나라 보물 황금양피를 훔치려 그리스 신화 제1세대 영웅 이아손이 그곳을 찾았다. 왕국의 메데아 공주는 이아손과의 사랑에 빠져 부친을 배신하고 그와 함께 보물을 훔쳐낸 뒤 추격한 남동생을 속임수로 도륙한 후 해상 도피 중 잠시 토미스를 들렀다. 그리스에 도착한 메데아는 처절한 배신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오, 잔인한 사랑의 광기여!
토미스 바닷가 언덕 광장 오비디우스 석상이 서 있는 곁 카페 골목은 흑해 북쪽 해안의 인접국가 우크라이나에서의 벌어지고 전쟁과는 무관하게 - 오, 멍청한 전쟁의 광기여! - 평온한 이른 저녁의 서늘함 속에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젊은이들이 오비디우스가 떠난 2000년 후에도 여전히 신화의 비밀을 간직하고 사랑을 호흡하고 있었다. 문득 백마강 낙화암 서사가 머리를 스쳤다./송전 한남대 명예교수·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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