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엽 교사 |
고향 사람이니, 재학생들을 괴롭히는 학교 밖 불량배나 일탈 학생들을 정리하라는 뜻이었다. 나의 교직은 그렇게 '교육 환경 개선'에 앞장서는 역할로 시작됐다. 교사는 전근 시 꼬리표가 따르기에 이후로 35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학생 생활지도'가 나의 타이틀이 됐다.
나의 운명이 된 이 업무는 그저 책상머리 앞에서 사무적으로 처리할 수도 없고 그래서 되지도 않는 일이었다.
이 때 문득 발령 전에 만난 인생 선배의 조언이 생각났다. 교사는 학교에서나 제자들의 졸업 후에도 쉼터가 될 수 있는 교사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 주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돈도 없고 수목 지식도 없으니, 인맥과 자기 노동으로 묘목을 모으고 길러 두서없이 나무를 심었다. 꽤나 큰 굴착기를 갖고 있던 친구의 도움으로 큰 둠벙도 만들었다. 정자도 두 채나 지었는데, 자재는 대개 학교와 교회에서 리모델링 공사로 버리는 것들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챙겨 놓았다가 재활용했다. 그리고 20여 년 후에 적어도 내 눈에는 근사한 숲 하나가 만들어졌고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공간이 됐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전학을 왔는데, 부모 이혼 후 외갓집에 맡겨진 아이였다. 이 학생은 첫날부터 삐딱한 행동으로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했으며 덩치와 포스도 만만치 않아 순진한 시골 아이들이 한껏 긴장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그 전학생과 어느덧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이 일상 탈출을 모의하고 있었고, 나는 그 아이들을 나의 '오픈카'(트럭을 나는 그렇게 불렀다)에 강제로 태워 집으로 달렸다.
멋모르고 납치된 아이들에게 내가 심은 나무 하나하나의 이름을 알려주며 각자의 이름이 붙은 이유와 의미를 설명했다. 마침 나는 약용식물관리사 자격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산에 자라던 더덕, 마, 산양삼, 익모초 등 다양한 약초에 대해 알려주고 직접 채취해 기르던 닭을 잡아 백숙을 끓여 먹었다.
그 때 삐딱이 전학생이 갑자기 익모초와 산양삼을 호주머니에 넣길래 "왜 그러니?" 물었다. 그 아이는 "저 때문에 우리 할아버지가 고생하시는 데, 선생님께서 익모초즙이 더위 먹지 않게 한다고 하니, 뜯어다 즙내서 드리려고요"라고 했다. 그 아이는 원래 그런 심성의 아이였던 것이다.
질병이 발생하면 원인을 찾아 치료하듯, 아이들의 일탈 행동에도 그 배경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는 단순히 학습이나 생활지도에서 시간표에 따라 지식을 전달하고 절차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진과 마음을 진단해 지치고 다친 본연의 능력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쉼터와 숨터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는 무사히 졸업했고, 취업하여 사회인으로 자기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설령 나의 제자 누군가가 졸업 후라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힘들어 할 때는 A/S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만든 숲은 나의 제자들이 어떤 이유로 삶이 힘들 때나 빚쟁이에 쫓길 때 또는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쉬어 갈 쉼터가 되길 바란다.
이제 정년을 1년도 채 남겨놓지 않았다.
돌고 돌아 다시 첫 학교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정년을 맞이하게 됐다. 누군가는 운이 좋다고 말하지만, 나에겐 내 지역에서의 평생 평판이 붙어 다닐 내 마지막 교직이기에 한편의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늘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안전 지도하기, 교통편이 어렵거나 강제 전학 온 아이 등교시키기, 5년 째 결식 학생 도시락 배달, 다양한 준거집단 활동으로 자신감 불어넣기, 마을교육공동체 활성화 시키기 등을 통해 힘들지만, 행복한 동행을 해왔다.
올해 초에는 50여 명의 이 작은 학교가 '대한민국 녹색기후상'을 수상해 동네가 들썩였다.
"선생님, 내년에도 이거 할 거예요?"라고 아이들이 물으면, 대답한다 "그래, 나는 늘 너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라고. /당진 고대중학교 노창엽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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