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교만(91) 씨가 피란 중 인민군과 조우한 대전 중구 침산동 아들바위 및 뿌리공원 방아미다리 모습. /사진=임병안 기자 |
6·25전쟁 발발 74주기를 나흘 앞두고 찾은 대전 중구 뿌리공원 건너편 아들바위는 가까이서 흐르는 유등천을 말없이 바라보는 듯했다. 1950년 이곳은 피란민들이 유등천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있던 곳으로 당시 태평동에 살던 진교만(92) 옹에게는 북한군 선발대를 마주해 생사의 갈림길 같은 곳이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전투에 대한 기억을 수집하기 위해 이뤄진 인터뷰에서 진 옹은 대전전투 개시 전 중구 침산동에서 마주한 북한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평상복 차림에 도리우찌라는 납작모자 쓴 남자가 아들바위 인근서 피난길을 재촉하는 진 씨를 잡아 세워 길을 물었다. "어디로 나가야 세천고개에 갈 수 있느냐." 겁을 먹어 대답하지 못하는 진 씨에게 납작모자의 남성은 다시 "그러면 잠시 여기서 기다렸다가 총열과 총열 다리를 짊어지고 운반하는 일을 도와라"고 요구했다. 진 씨는 자기를 잡아 세운 이들이 평범한 옷을 몸에 걸쳤지만 사실은 인민군이고 무장 군인들을 인솔해 길을 안내하는 선발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이때는 인민군이 금강을 넘어섰다는 소식은 전해졌으나, 대전에 총과 포 소리가 들리지는 않던 때다. 부모가 먼저 피란을 떠나 고향 정생동에 임시거처를 마련했고, 진 씨는 등에 난 부스럼을 마저 치료하고 정생동을 향해 유등천을 따라 걷다가 하천을 건너려던 찰라, 숨어든 인민군을 만난 것이다. 진 씨는 고름이 터져 피가 흐르는 등을 보여주며 총열을 짊어질 수 없다고 사정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
6·25전쟁 때 대전에 잠입한 인민군 선발대의 모습을 기억하는 진교만옹. /사진=임병안 기자 |
진 씨는 "그들은 총을 휴대하지 않았고 군복도 아니었으나 총열과 총열다리를 운반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인민군이 여기까지 벌써 내려왔구나 알 수 있었다"라며 "세천고개 가는 방향을 내가 직접 인솔했거나 총열을 쥐어 날랐다면 쓰임을 다하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 생각해도 무섭다"라고 회상했다. 진 씨의 목격담이 74년 만에 다시 주목되는 것은, 그들이 목적지로 삼았던 세천고개에서 후퇴하는 미군 딘 소장의 제24사단 인명 피해가 크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민군들은 갑천에서 본격적인 대전전투를 벌이기 전에 정림동 방향에서 구봉산 뒤, 보문산 뒤로 부대를 이동시켜 세천까지 잠입해 미군의 옥천과 금산 방향 퇴각로에서 잠복했다. 대전에서 옥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세천고개에서 예상 못한 기습을 당한 미군은 차량을 버리고 불을 질러 불능화한 후 걸어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피해를 겪었다. 오히려 북한군은 대전에서 금산과 옥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갑천에서 대전전투의 개시를 지연한 정황도 발견되는데, 진 씨가 경험하고 목격한 것은 긴박했던 7월 20일 대전전투에 앞서 7월 19일 인민군의 움직임을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진 씨는 또 수복한 대전에 복귀해 지금의 서대전공원의 미군묘지에서 대전시내 곳곳에 남겨진 시신을 수습해 안장하는 일을 담당했다. 진 씨는 "낙오된 병사들이 있었는데 안영동의 검은바위에는 인민군 총에 당한 미군 유해 3구를 안장해 훗날 미군으로 수송해 갔다"고 설명했다. 2023년 12월 문화동 경로당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대화를 나눴으나, 이번 취재 때는 건강상 이유로 전화 통화만 가능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