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
윤휴의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호는 백호·하헌이다. 두 돌 못 미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돌아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이괄의 난 때에는 여주의 옛집으로, 두 차례의 호란 때에는 보은 삼산의 외가로 가서 피란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는 선영이 있는 공주 유천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다. 윤휴의 학문은 19세 때에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송시열과 속리산 복천사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권준 등 남인계 인사들과 교분이 특별했고, 서인측 인사들과도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송준길·이유태·유계·윤문거·윤선거 등 서인 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민정중·민유중 형제는 특히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시국상황이 어수선해지며 당쟁의 혼돈은 극에 달하였다. 백호는 64세에 경신환국으로 사사됐다. 조선 후기 역사에서는 사라진 인물이 되었으나 여러 차례 추탈과 복직이 반복된 이후1907년 에 복권됐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이 있는가" 1680년(숙종 6년) 5월20일, 귀양 가던 중 서대문 밖 민가에서 사약을 받기 직전, 백호 윤휴가 했다는 마지막 말이다. 그의 죄는 중화 사대주의 사상에 맞서 독보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부국강병을 내세운 점이었다. 윤휴의 이름을 말하는 건 최근까지도 꺼려져 왔다. 윤휴를 입에 올린다는 건 윤휴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의미였고 불온한 것으로 여겨졌다. 윤휴는 주자의 설을 비판하진 않았다. 그런데 장과 절의 구분을 달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서인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주자를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삼아 신분 질서를 강화하고 사대부의 특권을 굳히려 한서인에게 윤휴는 마땅히 제거 대상이었다. 윤휴는 청나라를 치는 북벌이 실제 가능하다고 보고 57세가 돼 조정에 나갔다. 평민들을 위한 무과인 만인과를 실시하고 전차를 제작하는 등실제적인 북벌을 추진하려 했다. 양반사대부들도 군역을 함께 감당하는 호포법을 주장하고, 남녀 구별을 넘어 여성에게도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 는등 윤휴는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였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 그렇게 죽여왔던 시대, 그런 증오의 시대의 유산은 이제 청산할 때가 됐다" 대전에서 열리는 두 번째 추모제부터는 당대에 정치적으로 맞섰던 우암을 모시는 남간사유회의 도유사가 직접 추모제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고 묘소에 참배하며 그간의 불화와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는 계기가 되는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백호 윤휴의 선대는 대전을 항시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1970년 5월 윤휴는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인 이곳 대전 보문산 선영에 다시 잠들게 된 것이다. 윤휴는 조선시대 양반의 특권을 내려놓고 백성과 아픔을 함께한 시대를 앞서간 진정한 개혁가이며 선구자였다. 산성동 마을 백호 묘역의 이 추모제를 통하여 요즘시대정신과 같은 '개혁과 평등 정신'을 사람들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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