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화가 최북(崔北, 1720 ~ ?)은 갖가지 기행으로 유명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지자로 왕실의 광대가 되기 싫다며 화원이 되지 않았다. 스스로 명인이라 자부했던 그가 금강산을 보고 몹시 경탄했던 모양이다. 웃고 통곡하는 것으로 탄성을 쏟아내다, 최고의 풍광을 음미했으니 더 이상 삶이 의미 없다 생각했을까 "천하 명인 최북이 천하 명산에서 죽는다."며 구룡연에 뛰어 들었다.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 구해준 탓에 생명을 부지하였다. 정조대의 제일 문장가요 인재였던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금릉집金陵集>13권 '최칠칠전'에 전한 내용이다.
명산의 빼어난 자태에 어찌 최북만 탄복하였으며, 누구인들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기억이 지워지도록 내박쳐 두랴. 수많은 시인묵객이 경탄의 흔적을 남긴다.
금강산 서남쪽에 단발령(斷髮嶺)이 있다. 해발 834m의 고개로 남쪽에서 가려면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이 된다. 강원도 김화군 통구면과 회양군 내금강면 사이에 있다. 신라 멸망 후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 고개에서 삭발하고 은거한데서 명칭이 유래했다 전하기도 한다. 한편, 여기에서 바라보는 금강산 경치가 너무 고와 저마다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다. 삭발하고 속세 떠나 승려가 되고자 하여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역시 금강산을 몹시 사랑한 화가이다. 감동과 사랑의 크기 그대로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고뇌가 그림마다 고스란히 담겨있다. 독특한 기법, 새로운 기법들이 그것이다. 금강산의 특징이기도 한 일만 이천 봉 하나하나 어느 것도 빠트리고 싶지 않았나 보다. 전체가 담긴 그림이 여러 폭 전한다. 종합안내도처럼 자세히 그리기도 한다. 실제로 훗날 금강산 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하려 명소이름을 써넣기도 한다.
《신묘년풍악도첩》과 《해악전신첩》등에 선보인 흰색 뾰쪽뾰쪽한 봉우리, 새로운 구도도 특징이다. 날카롭고 단단한 느낌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그 놀라움을 표현해낼 새로운 기법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두 화첩 모두에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이 담겨있다. 소재와 구도는 비슷하지만 사뭇 느낌이 다르다. 《신묘년풍악도첩》에 있는 그림을 감상해 보자.
자신이 서있는 단발령을 그려 넣은 것도 특징이다. 단발령은 다른 시각에서 보았던 것이거나 상상의 배치일 것이다. 고개에 올라서자마자 구름너머로 경이로운 풍광이 등장한다. 탄성이 절로 나왔으리라. 어찌 그 순간이 잊힐 리 있겠는가? 잊고 싶겠는가? 봉우리는 또 얼마나 빛났으랴. 환상적 은빛 수정의 강렬한 인상이 흰색을 불러낸다. 미점(米點)으로 그려낸 육산, 단발령의 표현이 봉우리와 대조를 이루어 선계랄까, 이상세계가 더욱 강조되어 다가온다. 놀라움이 돋보이도록 중경은 모두 생략하고 구름안개로 처리하였다. 언덕에는 갓 쓴 선비와 가마꾼, 가마가 보인다.
겸재의 절친한 친구이며, 영조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사천(?川) 이병연(李秉淵, 1671 ~ 1751)이 이 그림을 보고 쓴 시도 감상해 보자. 조정육의 <붓으로 조선 산천을 품은 정선>에서 옮겨왔다.
'드리운 길은 구불구불한 용이 오르는 듯하고/드높은 꼭대기에는 두 그루 소나무가 보이는구나/하늘과 땅이 홀연히 만난 듯한 밝은 세상
봉래산 일만 봉을 처음 보았네/아침에 보니 신선이 사는 궁궐의 금자물쇠를 연 듯하고/가을이라 아름다운 허공에 부용꽃을 묶어 놓은 듯하구나/어떤 이는 이곳이 미치도록 좋아서/머리를 깎고 홀연히 세상을 등진다네'
정선,《신묘년풍악도첩》 중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조선 1711년, 비단에 색, 34.3×39.0cm |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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