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천 교수 |
한편, 중국어 또는 한문 원전을 한글로 옮긴 문헌을 가리켜 언해서라고 하는데, 15세기에는 주로 중앙에서 언해서가 간행되었고 16세기부터는 지방에서도 다량의 언해서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언해서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불경 언해서이며, 이를 통해 한글의 보급과 확산이 급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불경 언해서의 간행은 조선의 치국 이념인 숭유(崇儒)와 억불(抑佛)에 배치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을 언해의 주된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불교의 대중화에 초점이 있었다기보다는 왕실의 뿌리 깊은 불심에 기대어 한글을 널리 펴려는 의도와 왕권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지와 계획이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가령, 간경도감이 세조의 명으로 설치되면서 불경 언해의 간행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서 <능엄경언해>는 세조가 직접 구결을 달고 한계희, 김수온 등이 혜각존자 신미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였으며, 뒤이어 <법화경언해>도 간행하였다. 그 외에도 세조가 직접 구결을 달고 신미 등이 번역한 <선종영가집언해>, 세조가 번역한 <아미타경언해>, 세조가 구결을 달고 한계희 등이 번역한 <금강경언해>, 세조가 구결을 달고 신미, 효령대군, 한계희 등이 번역한 <원각경언해> 외에 <반야심경언해>, <사법어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등 모두 9종의 불경 언해서가 간경도감에서 간행되었다.
1471년에 간경도감이 폐지된 이후에도 불경 언해서는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된 내수사에서 간행이 되거나 왕실 여성인 대비나 왕비들이 주도하여 이루어졌으니, 왕실의 시주를 받아 고승 학조가 <관음보살주경>을 편찬하고,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금강경삼가해>가 간행되고,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의 명으로 학조가 <육조법보단경언해>를 중앙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16세기부터는 지방에서도 다량의 불경 언해서가 간행되었는데, 합천 봉서사에서 <목우자수심결언해>의 중간본 간행을 필두로 경상도 장수사에서 <영가집언해>, 전라도 완주에서는 <부모은중경언해> 등이 복각되어 간행되었다. 물론 지방에서 간행된 불경 언해서는 오각과 탈각이 많다 보니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원간본의 인쇄 및 지질(紙質)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 불경 언해서가 한글의 보급과 확산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한편, 임진왜란으로 많은 한글 문헌들이 소실되다 보니 17세기에는 교정청을 설치하였으며, 전란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 잡기 위해 교화서로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 유교 경전의 언해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의 실용을 위해 <언해태산집요> 등 의학서나 <노걸대언해> 등의 외국어 학습서의 간행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방각본 한글 소설이 등장하고 천주교 서적의 번역과 한글 성경의 간행으로 한글의 보급이 가속화되고 한글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한글은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니 이로써 한글 창제 및 한글의 보급과 확산 과정에서 불경 언해의 역할이 상당히 컸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