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보문산 일원 동굴에 남은 이름 없는 근로자들의 굴착 흔적들. (사진=임병안 기자) |
1. 지하호 27개와 일제 육군조병창
2. 강제동원 규명과 역사 바로알기
3. 전쟁유산의 대전 보문산 재발견
1905년 대전역 준공과 1929년 대전신사 이전 그리고 1932년 충남도청 신축까지 일제강점기 대전에서 벌어진 것들이 자세히 기록된 반면, 수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을 보문산 일원의 동굴에 대한 기록은 지금까지 꽁꽁 숨은 채 드러나지 않고 있다. 패망을 앞둔 1944~1945년 사이 일제가 대전을 전쟁 기지화했다는 가정이 나오고 있으나 이를 증언할 이들이 거의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대로 기억이 지워질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대전 보문산 일원에서 최근까지 발견된 동굴은 모두 12개에 이르고 있다. 중구 호동에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한 깊이 50m 동굴이 최근까지 고구마 보온창고로 활용됐고, 이로부터 직선으로 500m 떨어진 석교동 산비탈에도 'ㄱ'자로 꺾인 동굴이 누군가 벽면을 깎은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부사동에서는 벽돌로 입구를 막은 동굴 3개가 몇 미터 간격으로 줄을 지어 군락을 이루고, 주민들 증언을 통해 실존할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호동 1개, 석교동 2개, 신상동 1개 등이다. 이들 동굴을 언제 누가 조성했는지 기록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으로 주민들 증언이 간헐적으로 수집되는 실정이다. 박영규(96) (주)삼화모터스 회장은 일제강점기 대전중학교 재학 때 보문산 동굴조성 현장에 근로 동원된 경험 증언을 통해 "보문산 동굴에서 자동차에 자갈을 실어 날랐고, 현장에서 지휘는 일본군과 군속(군무원)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훗날 대전지역에서 학자와 평론가, 교육자의 삶을 산 지헌영(1911~1981) 선생이 보문산 동굴에 대해 "일제의 전쟁 목적"이라고 설명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변평섭 세종시 전 정무부시장은 중도일보와 통화에서 "1960년대 중반에 지헌영 선생과 향토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는데,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미군 조선의 남쪽에 상륙했을 때 결정적 전투를 대전 산악지대에서 벌이기 위해 일제는 용산에 있던 조선관군사령부를 대전중학교 운동장으로 옮기고, 보문산에 전쟁 목적의 동굴을 팠다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변평섭 전 부시장은 1972년 발간한 '한밭승람'에서 "미군에 의해 지속적인 패전을 당해 몰리게 되자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려고 그 결전장을 대전지방의 산악지대로 잡았다"고 기술한 바 있다.
대전에서 결전 목적의 지하호 성격의 동굴을 조성했다는 의견으로 인천시 부평구가 문화원을 통해 연구와 시민참여사업을 실행해 역사와 실체를 규명한 사례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또 역사적 사실 규명에 이은 문화적 승계를 통해서 시민들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산내골령골 등 역사적 슬픔을 작품으로 위로해온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전 회장은 "일제강점기 대전에서 벌어졌으나 모르던 일을 찾아 이를 조명하는 것은 역사를 바로 보는 중요한 과정으로, 역사적 가치가 뚜렷해지고 연구자료가 만들어지면 이를 문학적으로 다뤄 시민들이 조금 더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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