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이솝 우화가 있다. 조금 보태어 기억나는 대로 적자면 다음과 같다. 당나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 당나귀는 매일 장군들이 타고 다니는 크고 멋진 말들을 부러워했다. 그날도 당나귀의 등에는 무거운 짐이 실리고 있었다. 얇은 천 한 장 깔린 등으로 무거운 짐이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 작고 보잘것없고 무거운 짐만 잔뜩 진 내 앞에 사람들이 앞을 물러서고 심지어 절까지 하는 게 아닌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귀족과 상인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당나귀는 귀신에 홀린 듯 길 한복판을 걸어갔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등에 제우스 신상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부는 그런 당나귀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세게 내려치고 있었다.
당나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린 줄 알았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그따위는 금방 익숙해진다. 등에 제우스 신상이 올려진 순간에 그리 무거웠던 그 제우스 신상의 무게는 사람들의 조아린 머리에 의해 금방 잊혀진다. 땅을 바라보던 당나귀의 머리는 금방 하늘로 쳐들게 된다. 그런 것이다. 우린 때로 '나' 자신이 아니라 내 등에 얹힌 '제우스 신상'을 '나'라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다 보니 저절로 그리된 것이다. 나이는 제우스 신상일까? 나이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그가 살아온 경험으로 인해 더 지혜로울 것으로 추측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나이든 사람이 그렇진 않다. 직책은 제우스 신상일까? 내려놓는 순간 그는 그냥 동네 아저씨나 아줌마일 뿐이다. 형이나 부모란 이름은 어떤가? 교수나 박사는? 시장이나 검사나 대통령은 어떠한가? 신부님이나 목사님이나 스님은? 말은 등에 장군이 타고 있을 때도 등에서 장군이 내려도 여전히 말이다. 털을 빗어 주고 좋은 먹이를 주고 맑은 물을 먹인다. 하지만 당나귀는 다르다. 제우스 신상을 내렸을 때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냥 당나귀이다. 그럼 나는 말인가 당나귀인가? - 우리 후배님의 말씀에 의하면 난 그때 당나귀 짓을 한 것이 틀림없다.
22대 국회가 5월 30일을 기점으로 입법활동을 시작했다.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4년을 위해 저마다의 신념과 국민을 섬기는 마음으로 의정활동을 해주리라 믿는다. 꼭 그리해 주리라 믿는다.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은 때로는 무거울 것이고 등을 짓누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머리를 조아리는 국민에 의해 그 무게가 잊혀질 것이다.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나에게 조아리는 것인지 내 등에 얹힌 짐에 조아리는 것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말이 되기도 하고 당나귀가 되기도 한다. 시민들은 그가 말인지 당나귀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얼마 전 한 당선자가 TV 프로그램에서, 당선 후 좋기는커녕 부담감으로 잠을 못 잤다는 말을 들었다. 작금의 나라 현실을 고민하는 그의 자세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신중하면서도 추진력 있게 국정을 논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아 참 좋게 보였다. 그래야 한다. 그의 등에 실린 짐의 무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좋아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걱정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나라를 개혁하고 싶어 하는가? 저마다 소명감을 갖고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길로 나라를 움직이는 데 기여하고 싶어야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시민들은 당선자들에게 그 기회를 주었다. 콕 찍어서. 얼마나 영광스럽고 행복한 일인가? 4년 후, 모두가 등에서 짐을 내렸을 때, 그때도 우리 시민들이 진심으로 그 300명 모두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성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