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한 교수. |
다국적 기업의 등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던 사회는 구분이라든가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뉴욕주립대 영문학자인 피들러(L. Fiedler)는 "경계를 넘어서 간극을 좁히라"라는 구호로 이 정신을 설명한 바 있다. 삼성이 우리 고유의 기업이 아니라 여러 국가에 걸쳐 있는 기업, 곧 다국적 형태인 것, 그것이 포스트모던의 실체인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은 기업 문화에 한정되지 않고 문화를 비롯한 사회의 여러 면으로 확산되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동안 중심에 있는 것들이 주변으로 물러나는가 하면, 주변적인 것이 중심으로 복귀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고급문화와 저급 문화가 자리바꿈을 한다든지 혹은 그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제3의 다른 형태들의 문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경계를 넘는 현상들은 예술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문학과 미술, 혹은 음악과 만남이라든가 미술과 음악과 만남 등등으로 구현되었다. 건축에서도 이런 현상들은 예외가 아니었다. 판에 박힌 건축이 아니라 정형을 거부하는 건축들, 새로운 형식의 건축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전통적인 무협 영화에 공상 과학이 결합함으로써, 이전과는 전연 다른 형태의 영화가 등장하기도 한 것이다. '동방불패'라든가 '백발마녀전' 등의 영화가 그러했다.
이렇듯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지금까지 고정화된 여러 관념을 부정하고 새로운 형태의 문화나 질서를 만들어왔다. 이를 두고 카오스의 시대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또 새로운 코스모스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쯤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런 열린 개방성은 정치적 세계로도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기왕의 정치 체계들 역시 새롭게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미국과 소련 중심의 전통적인 양극 체제가 무너지기도 하고 자본주의라든가 사회주의와 같은 거대 서사도 힘을 잃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경계를 넘고 간극을 좁히고자 한 포스트모던 정신의 에네르기가 이루어낸 결과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아니 한국의 정치 현실은 이런 시대적 조류와는 반대되는 길을 걷고 있다. 좌우 논리라든가 흑백 논리가 강요되면서 "경계를 세우고 간극을 넓히는" 현상이 곳곳에서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넘어서기'와는 전연 다른 '경계만들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도입하고 있고, 사회주의는 또 자본주의를 받아들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면서 복지 국가로 나아가는가 하면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생산성의 확대 등이 모색되고 있다. 그래서 복지의 모델로 스칸디나비아 3국의 자본주의적 사회주의 국가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국가가 탄생하기도 했다. 과거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는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한국 사회만 양극 체제를 강요한다. "경계를 세우고 간격을 넓히라"고 말이다. 보수가 어쩌고 진보가 어쩐다고 계속 떠들어대고 걸핏하면 좌파 프레임을 씌운다. 편을 나누고, 국민이 이에 호응하면 정치적 성과로 받아들인다. 언제적 좌파이고 우파인가. 요즈음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AI도 궁극적으로 보면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다. 이런 화학적 융합 현상, 경계 넘어서기가 시대의 대세인 것이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사회로의 변증적 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정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대의 임무이다. /송기한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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