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현근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 |
선호란 '여럿 가운데서 특별히 가려서 좋아함'을 뜻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의 선호 표출과 충족을 위한 대표적인 제도가 시장과 대의민주제다. 시장경제는 가격을 매개로 거래와 교환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선호를 드러내는 행위에 기초한다. 대의민주제의 투표는 경쟁하는 후보 중에서 자신의 가치 또는 이익을 대변해줄 최적의 후보에 대한 선호 표시를 의미한다. 시장경제와 대의민주제의 공통점은 가격지불과 투표 행위에서 나타나는 시민 선호를 주어진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당 선호의 형성과정을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 논리를 상징하는 '소비자주권'은 소비자 선호의 형성과정은 불문에 부치고 표현되는 그대로 존중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대의민주제도 유권자 선호를 주어진 것으로 취급하면서 표의 단순 합산을 통해 국민 선호의 개요(槪要)를 파악한다. 두 제도 모두 시민이 새로운 정보, 주장, 관점의 노출만으로 쉽게 변할 수 있는 선호를 가진다는 점을 간과한다.
'연금개혁 공론화 500인 회의'는 전형적인 '숙의(deliberative)민주주의' 형식을 따른다. 숙의민주주의는 시민의 선호를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시민 선호의 단순 합산이 공공성(公共性)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대신 보통 시민도 대화와 토론과 학습을 통해 '깨달음을 통한 선호' 또는 '정제(精製)된 선호'가 형성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숙의민주주의는 시민참여 과정에서 정보와 주장의 교환을 통해 서로의 생각과 선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조정하면서 최종적인 판단에 도달하는 통합의 과정을 강조한다. 공론화 회의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사적 논리가 아니라 '공적인 이성(public reason)'에 근거한 합리적 주장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다. 예를 들면, 낙태 문제의 경우 '태아의 생명 존중'과 '여성의 행복 추구' 같은 공적 이유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때 단순 다수결에 따른 의사결정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해당 집단의 공적 논거를 통째로 거부한다. 숙의민주주의는 낙태 찬반의 공적 논거에 관한 충분한 토론과 교감의 기회가 좀 더 정제된 선호 형성의 가능성을 높이면서 그만큼 절충된 합의 가능성도 커진다는 점을 부각한다.
숙의민주제는 '전문가는 똑똑하고 국민은 어리석다'라는 전제를 거부하고 보통 시민의 가치 및 정책 판단 역량에 대한 신뢰로부터 출발한다. 오히려 전문가 중심의 정치와 행정의 지나친 의존이 일반 시민의 의사소통과 판단 역량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감의 상실을 가져왔다는 반성에 기초한다. 공론화 회의의 시민은 타인의 관점을 존중하고 반응하면서 공공선을 위해 공동체에 관여하는 '적극적 시민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론화 회의는 치열한 경쟁의 '월스트리트 게임'이 아니라 상호 소통과 의존성에 입각한 '공동체 게임'에 초대된 시민들이 얼마나 멋진 경기를 펼칠 수 있는가를 확인시켜준다.
정책 결정이나 공공갈등 해결을 위한 대의민주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일반 시민의 토론과 학습을 통한 정제된 판단을 확인하고 반영하는 숙의민주제의 적용사례가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대전시 보문산 개발을 포함해 다양한 공공갈등을 두고 시장(市長)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라 공론화 회의 같은 숙의민주제를 통해 시민의 판단을 묻고 반영하는 것이 대전시의 민주적 시정 역량을 강화하는 중요한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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