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나는 최후의 인간이다"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나는 최후의 인간이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승인 2024-05-13 15:55
  • 신문게재 2024-05-14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조훈성 연극평론가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오월, 높고 높은 하늘인지라 우러러 받들어 모셔야 할 일이 많다. 그렇게 만날 모심으로 가득한 오월이었는데, 이번 참에는 초등학교 학부모가 돼 드디어 빨간색 종이로 접은 카네이션과 제법 문장을 갖춘 편지, 또 효도쿠폰까지 받아든다. 기념일이야말로 기억보존실과도 같다. '반추(反芻)'라는 말이 소나 염소가 꼴을 되씹어 삼키는 일에서 생겨났듯이, 그 이어달리기하는 오월의 기념일이야말로 우리 삶의 되새김질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꾹꾹 눌러 쓴 삐뚤빼뚤한 자모의 의미를 되새김하면서 나는 그 '사람됨'의 도리를 제대로 다하지 못해 뜨거워진 눈가를 비벼가며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앞의 연극, 그 무대도 삶의 되새김질이나 다름없다. 셰익스피어가 됐든, 아서 밀러든, 외젠 이오네스코든 내 앞의 무대가 추앙한 그들의 작품을 다시 들춰보면서 결국 연극 안의 문제적 인간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전, 소극장 상상아트홀에서 극단 이화의 <코뿔소>(이오네스코 원작/최석원 연출)를 봤다. 코뿔소로 변신하는 인간들을 통해 획일화된 현대사회의 공포를 우화화한 작품으로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희곡이기도해 잔뜩 기대를 하고 극장을 들었다. 요즘 연극 추세가 작품 서사의 공간과 상황을 연출하면서 스케일이나 시간적 제약을 넘어 장대해지는 것도 특징이긴 한데, 지역 소극장 연극에서 인터미션까지 두 시간 반이 넘는 작품을 아주 오래간만에 만났다.

이미 2019년 정동 인쇄골목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구석으로부터'에서 <소음>(이은영 연출)을 보고 원작<코뿔소>의 재해석에 대해 리뷰를 쓴 기억이 있는데, 이번 극단 이화의 <코뿔소>는 이에 비해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사가 많은 희곡 가운데 하나지만, 그 대사가 결국은 사람들이 점점 모두 코뿔소로 변신해가는 상황에 대한 설득이니만큼 '무소'들에게 점령당해가는 세계에서의 '인간'의 존재 의미를 얼마나 잘 부각시킬 수 있느냐가 이 연극의 관건이기도 하다. 특히 극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베랑제'의 역할이 커서 작품 메시지의 공감대는 여기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최후의 인간이다'라는 베랑제의 대사를 기억하면서, 오늘의 '부조리극', '부조리성'에 대한 내 편견, 고정관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의 극장을 순회하면서 경험했던 그 연극의 무대에 대한 인상, 기억으로 인하여 오히려 새로운 시선의 오늘의 무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삼켰던 꼴을 되새김질 한다는 게 내 앞에 놓여진 연극의 팔팔한 생기보다 그 대단하다 믿고 있는 '과거의 기억'에 끼워서 비교하고 품평을 늘어놓고 있다 여겨진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신주단지처럼 믿고 있는 것이야말로 '답습'에 지나지 않고 있는지 골목, 골목을 지나며 돌아오는 걸음에 쉼표를 둔다.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윌리로먼 비긴즈>(아서 밀러 원작, 김현탁 연출)를 봤다. 작품은 원작<세일즈맨의 죽음>의 서사를 해체, 재구성하면서 1인칭 시점의 윌리의 회상과 환상을 극화한다. 당대의 미국 자본주주의 사회의 비극에 국한시키지 않고 동시대적 관점에서의 성공에 대한 치열한 경쟁을 위한 내달림을 형상화하면서 연극적인 재미와 메시지를 차별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오늘의 연극은 꾸준히 고전을 무대화하고 있는데, 내 시선은 오늘의 고전을 보지 못하고 어제의 고전에 머물고 있지 않은지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베랑제'든 '윌리'든 극중 최후의 인간인 그들의 꼴을 나와 겹쳐 본다. 결국 인간은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기억과 희망이라는 과거와 미래로 존재하고 또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가.

연극의 그 긴 시간 모든 장면이 다 좋을 순 없다. 어디 연극뿐이랴, 생활이 그러하듯, 단 한 장면의 인상만으로 빛이 날 수 있는 게 삶이다. 평범한 수많은 분절의 시간 속에서 꼭 비범한 초, 분, 시가 존재하듯 생활의 비범한 한 장면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의지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새김하면서도 이미 나는 그 코뿔소떼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그 최후의 인간으로 남겨진다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