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내 앞의 연극, 그 무대도 삶의 되새김질이나 다름없다. 셰익스피어가 됐든, 아서 밀러든, 외젠 이오네스코든 내 앞의 무대가 추앙한 그들의 작품을 다시 들춰보면서 결국 연극 안의 문제적 인간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전, 소극장 상상아트홀에서 극단 이화의 <코뿔소>(이오네스코 원작/최석원 연출)를 봤다. 코뿔소로 변신하는 인간들을 통해 획일화된 현대사회의 공포를 우화화한 작품으로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희곡이기도해 잔뜩 기대를 하고 극장을 들었다. 요즘 연극 추세가 작품 서사의 공간과 상황을 연출하면서 스케일이나 시간적 제약을 넘어 장대해지는 것도 특징이긴 한데, 지역 소극장 연극에서 인터미션까지 두 시간 반이 넘는 작품을 아주 오래간만에 만났다.
이미 2019년 정동 인쇄골목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구석으로부터'에서 <소음>(이은영 연출)을 보고 원작<코뿔소>의 재해석에 대해 리뷰를 쓴 기억이 있는데, 이번 극단 이화의 <코뿔소>는 이에 비해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사가 많은 희곡 가운데 하나지만, 그 대사가 결국은 사람들이 점점 모두 코뿔소로 변신해가는 상황에 대한 설득이니만큼 '무소'들에게 점령당해가는 세계에서의 '인간'의 존재 의미를 얼마나 잘 부각시킬 수 있느냐가 이 연극의 관건이기도 하다. 특히 극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베랑제'의 역할이 커서 작품 메시지의 공감대는 여기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최후의 인간이다'라는 베랑제의 대사를 기억하면서, 오늘의 '부조리극', '부조리성'에 대한 내 편견, 고정관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의 극장을 순회하면서 경험했던 그 연극의 무대에 대한 인상, 기억으로 인하여 오히려 새로운 시선의 오늘의 무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삼켰던 꼴을 되새김질 한다는 게 내 앞에 놓여진 연극의 팔팔한 생기보다 그 대단하다 믿고 있는 '과거의 기억'에 끼워서 비교하고 품평을 늘어놓고 있다 여겨진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신주단지처럼 믿고 있는 것이야말로 '답습'에 지나지 않고 있는지 골목, 골목을 지나며 돌아오는 걸음에 쉼표를 둔다.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윌리로먼 비긴즈>(아서 밀러 원작, 김현탁 연출)를 봤다. 작품은 원작<세일즈맨의 죽음>의 서사를 해체, 재구성하면서 1인칭 시점의 윌리의 회상과 환상을 극화한다. 당대의 미국 자본주주의 사회의 비극에 국한시키지 않고 동시대적 관점에서의 성공에 대한 치열한 경쟁을 위한 내달림을 형상화하면서 연극적인 재미와 메시지를 차별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오늘의 연극은 꾸준히 고전을 무대화하고 있는데, 내 시선은 오늘의 고전을 보지 못하고 어제의 고전에 머물고 있지 않은지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베랑제'든 '윌리'든 극중 최후의 인간인 그들의 꼴을 나와 겹쳐 본다. 결국 인간은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기억과 희망이라는 과거와 미래로 존재하고 또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가.
연극의 그 긴 시간 모든 장면이 다 좋을 순 없다. 어디 연극뿐이랴, 생활이 그러하듯, 단 한 장면의 인상만으로 빛이 날 수 있는 게 삶이다. 평범한 수많은 분절의 시간 속에서 꼭 비범한 초, 분, 시가 존재하듯 생활의 비범한 한 장면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의지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새김하면서도 이미 나는 그 코뿔소떼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그 최후의 인간으로 남겨진다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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