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붕 박병배 선생의 흉상 제막식이 거행된 대전외고에서 참석자들이 서붕 선생의 교육입국의 뜻을 기렸다. (사진=임병안 기자) |
봄기운 무르익은 5월 7일 대전외국어고등학교 교정에 지역 교육계 중요 인사들이 하나둘씩 찾아오면서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붕 박병배(1917~2001) 선생의 흉상 제막식을 맞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명문 공립학교로 성장한 대전외고에 모인 것이다. 설동호 대전시교육감을 비롯해 박영철 돈운학원 이사장과 박세철 장훈학원 이사장, 박우숙 서붕장학재단 이사장이 참석하고, 서대전여고를 비롯해 대전예술고, 장훈고 관계자들도 빠짐없이 그를 기억하고자 모였다. 전국의 우수 인재가 입학하는 대전외고에 학생들이 오전과 오후 등·하교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서붕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것이다.
▲대전외고 교육부지 기부
서붕 선생은 이곳에 학교 부지 터를 닦고 진입로까지 내어 2000년 3월 대전시교육청에 무상으로 땅을 기부했다. 인구 150만 명의 광역시 중에서 행정과 정치·사법의 중심지인 둔산지구가 내려다보이고 도솔산 숲을 품은 이곳은 2000년 기부가 이뤄질 때에도 시장 가치로는 200억 원으로 평가될 정도였다. 또 서구 둔산동 일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고등학교 부지가 절실한 대전교육 행정당국과 학생, 학부모에게는 서붕 선생의 학교부지 기부는 마른 목을 축이는 약수가 되었다. 서붕 선생이 기부한 부지(4만219㎡)에 대전시교육청은 학교를 짓고 대전외고를 2003년 개교해 최근까지 외국어 전문가와 국제 감각을 갖춘 인재 7940명을 배출했다.
이날 학생과 학교 관계자들에게 공개된 흉상에는 서붕 선생이 걸어온 길을 요약한 약력과 대전시교육감의 건립취지문 그리고 2000년 대전외교 부지 교육재산 기증식 사진이 함께 새겨졌다. 제막식을 계기로 2000년 대전외고 부지 기부 때 뉴스를 찾아봤다. 당시 교육재산 전달식에서 서붕 박병배 선생은 "평소에 품어온 교육적 소신을 마지막으로 펼치기 위해 수년간 공을 들여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학교 부지입니다. 대전시교육청에서는 훌륭한 명문고등학교를 세워 사회가 필요로하는 인재를 육성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설동호 대전시교육감은 "터를 닦아 진입로까지 내어 200억 원 상당의 부지를 교육기관에 기부한 사례는 서붕 선생이 유일할 것이다"라며 "서붕 선생께서 평소 말씀하신 교육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는 교육입국의 뜻을 이어받고자 동상을 세우고 덕행을 계승하겠다"라고 밝혔다.
서대전여고와 대전예술고 교정 전경. |
"국가운명은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어떻게 자라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서붕 선생이 교육과 인재양성을 강조하면서 누누이 강조하던 말이다. 인간의 품성과 인격은 중·고등학교 때 형성되는 만큼 이 시기의 교육이 중요하다며 스스로 재산을 헐어 학교를 세워 책상을 들이고 운동장을 닦는 데 아낌없이 투자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과 임야를 자손에게 물려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유훈과 자신의 철학에 따라 1984년에는 서대전여고 세우고 1992년에는 대전예술고등학교를 개교해 후학을 양성에 힘썼다.
서붕 선생이 교육사업이 헌신한 데는 확고한 신념이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의 자질과 역량이 향상되어 민주시민으로서 제 몫을 해내야 국가의 근간이 바로 선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사재를 아끼지 않고 사학경영을 통해 교육발전을 이루고자 했다. 일찍이 여성교육과 문화예술발전의 중요성을 깨달아 서대전여자고등학교를 개설할 때는 교정에 신사임당 동상을 세워 교육지표로 삼았다. 서대전여고는 월평공원 도솔산 자락의 넓은 터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교정에는 수령 200년에 달하는 소나무 숲과 햇볕 잘 드는 본관 건물에 도서관, 급식실, 강당이 조화를 이루는 최적의 교육환경을 갖췄다. 명문 사립 일반계 고등학교로 성장해 지난 1월까지 38회 졸업생을 배출해 1만3603명의 여성 인재를 양성했다.
또 1992년 대전예술고등학교를 세워 꿈을 품은 학생들이 끼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고등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대전예술고는 충청권에서 처음으로 개교해 음악과, 미술과, 무용 등 중부지역 예술교육의 요람이 되어 최근까지 578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금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중부권 명문 예술고등학교로 성장해 예술문화 저변 확대에 이바지하고 우리나라 예술교육 발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서붕 박병배 선생이 1970년 집필한 '국가유지론서설'과 책 속에 서붕 선생의 필기. |
서붕 선생이 2001년 타계한 후 많은 인사들이 추도사를 통해 애도하고 그가 걸어온 길을 추모했다. 홍선기 당시 대전시장은 "대전공립중학교 시절부터 독서회에 가담, 반일운동을 펼치시다 옥고를 치르시고, 경성제국대학을 두 번이나 입·퇴학을 거듭하실 정도로 혼탁한 시류에 동조함 없이 오로지 나라 장래를 위한 일에 분골쇄신하셨다"라며 "미군정으로부터 치안과 자위권을 확보하고 건국대업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한 일 등은 우리 시민들의 가슴속에 길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심대평 충남도지사는 "삶의 마지막 땀방울까지 사회에 바치셨으며 수백 억 원에 이르는 토지를 학교 부지로 희사하신 끝없는 향토애로 지역민을 감동시켰습니다"라며 서붕 선생의 삶을 기억했다.
서붕 선생과 생전에 가까이 교류한 변평섭 전 세종시정무부시장은 최근 중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충청인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고 회상했다. 변평섭 전 정무부시장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설 때 그의 전매특허는 '대전의 아들 박병배' 였고 지역 한센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거리낌 없이 교류하던 투사적이고 바위 같은 강인함으로 기억된다"라며 "존슨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와서 국회 연설할 때 서붕 선생이 선비의 전통의상인 도포에 갓을 쓰고 국회에 등원해, 우리 충청도 양반은 귀한 손님을 맞을 때는 이렇게 입는다며 특유의 너털웃음을 웃었다"라고 기억했다. 서붕 선생이 1970년 집필한 '국가유지론서설'에는 당시 시행되던 산아제한 정책에 대해 '국가쇠망을 자초하자는 철없는 짓'이라고 날카롭게 비평했고,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길'이나 '한·미·일의 장래'에 대한 논리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정론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후세대에 남기는 유지가 되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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