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섭 교수 |
얽히고설킨 사람 사이 문제를 치우치지 않는 공평함으로 아우르고 미래의 일까지도 통찰로 두루 살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도자를 찾다 보니 대개는 똑똑한 전문가 직군의 사람들을 찾아냈다. 나라를 경영하는 정치인이 그렇고 다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법관이 그랬으며 미래 세대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교육자나 혼란한 삶에 위로와 평온을 중계하는 종교지도자가 그랬다. 하물며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의사는 어떻겠는가? 그리하여 이 사람들에게 사회는 권위를 인정하고 많은 보수를 가지는 것도 동의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사회가 맹목적으로 존경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부분 전문가 직군에서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인은 국민을 위한 봉사보다는 자리만 지키려는 협잡꾼이자 술자리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고, 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보다는 침소봉대하여 겁박하거나 더 많은 수임료를 위해 스스럼없이 악당의 편에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선생님은 먼 옛말이고 윽박질러 죽음으로 내모는 일도 일어난다. 종교계도 편을 지어 패싸움을 벌이거나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신자를 선동하는 정치집단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다른 어떤 직업군보다 전문적이고 오랫동안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인 의사도 그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 간혹 터져 나오는 뉴스거리의 일탈 행동이 아닌 대부분 의사 지망생과 교수들까지도 환자와 국민을 대상으로 파업이라는 집단행동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 수를 늘리면 배출되는 의사의 질이 낮아져 국민의 생명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나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여러 해 전, 사법고시를 폐지하고 법학전문대학원 체제로 바꾸려 하자 방송에서 고시 출신 토론자가 그리하면 법관의 질이 낮아진다는 논리를 펴던 장면이 떠오른다. 선발된 소수 엘리트 말고는 자격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억지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보라는 정부의 간곡한 권고에도 강짜만 놓는다.
특기할 사실은 지난 2000년 있었던 의약분업으로 촉발된 의료대란을 겪으면서 의사협회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일이 의사윤리강령과 의사윤리지침을 제정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의사가 사회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의사 스스로 윤리의식이 투철해야 한다는 자성이 있었다. 결국, 의사가 존경받고 고소득을 포함한 사회적 대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윤리에 기반을 둔 사회의 신뢰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이다.
건강에 관심이 높아진 국민이 매체를 통해 수많을 의학지식을 접하고 있고 각종 진단 장비는 나날이 첨단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복잡하고 어려운 수술은 로봇이 점차 대체해가며 그 속도는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2013년에 개봉한 SF영화 엘리시움에는 환자가 힐링머신에 들어가 잠시 누워 있으면 순식간에 난치병이 치료되는 첨단 의료시스템이 등장한다. 우리 사회는 점차 그런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가만히 가까운 미래를 상상해본다. 첨단장비가 진단하고 AI가 최적의 치료법을 제안하며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의 손이 아닌 오차를 허락하지 않는 정교한 로봇이 수술을 집도하는 세상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의사는 무엇으로 전문성과 존경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시대 마지막 남은 성역인 의사는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해나갈까? 기대가 크다.
/송복섭 한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