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
경부선 개통 후 대전 거주 일본인들은 1907년 4월 초에 소제산에 '태신궁'과 대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소제공원'을 세웠다. 태신궁은 10년 뒤 공인 신사인 '대전신사'로 바뀌었다. 신사는 일본인들이 특정 신위를 모시고 복을 비는 민간신앙의 공간이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후천황제가 확립되고 신도가 국가종교로 발전해 일본 국가 제례의 상징 공간이 되었다. 대전 신사의 위치가 철도와 단절된 곳이라 통행이 어렵고, 경내가 사유지로 불편하여 일본 거류민회의 현안이 되었다. 당시 대전 양조업계의 큰손 '쓰지 긴노스케'가 지금의 대전 성모여고 자리송림 만평을 기부해 1929년 이전해 갔다. 대전 신사가 대흥동으로 이전 하기 전까지 소제산은 대전의 전통 마을이 자리한 상징적 공간이자 랜드마크였다.
일제강점기 공원은 근대화의 산물이자 식민화의 현장이었다. 대한제국 군인의 추모 공간이던장충단공원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가 들어서며 조선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조선 왕실의 궁궐은 식물원, 동물원 같은 테마파크로 변했고 각 지역에 신사(神社)도 공원이 되었다. 1910년부터 일본의 한국 식민화 과정에서 '근대 문명화 전략'을 추진했는데, 식민지민들이 자국의 문화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해 식민 지배를 쉽게하는 것이었다. 식민주의는 단순히 복종하게 만드는 능력보다 식민지민이 전근대적인 자기 문화를 제국주의 근대문화와 대비시켜 자신들의 문화가 얼마나 후진적 인지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식민주의 전략을 적극 활용하여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였다. 그리하여 한인들은 식민지민으로 전락하여 독립에 대한 의지가 약화 됐다. 이 문명화 전략의 하나로 추진한 것이 근대의 발명품이라 불리는 '공원'의 조성이었다. 식민 시기 한국인들은 근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누리기 위해 오락 공간이자 놀이공간인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근대문화를 향유하는 제국의 신민이 되어갔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대전역세권 일원 재정비촉진사업으로 대전 역세권 내 문화시설을 확충하는 '소제동 중앙공원 조성' 사업이 행정절차가 마무리되면서 소제산 일대가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대전시는 소제동 일원 3만 4220㎡ 부지에 문화 공원을 신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대전역세권 재정비촉진지구 내 공원 조성을 통해 원도심에 부족한 힐링 공간 제공 및 도시 균형발전 모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일제의 패전으로 한국이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은 식민지배의 종식이 정치체제나 식민권력에 국한되는 경향이었다. 일제의 근대 문명화의 이름으로추진된 문화적 침투는 오늘날까지 각 분야에 자리하고 있다. 그 잔재의 청산 과정 및 정체성의 회복은 현재도 진행 중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제중앙공원' 추진 과정에서도 왜곡된 '근대공간'의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모아져야 한다. 지금 소제산 일대에조성되는 사업은 대전의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 해체된 전통 마을과 공간의 역사를 제대로 회복하고 청산하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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