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미미한 존재로 남아있던 대전이 역사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근대 이후의 일일 것이다. 특히 경부철도가 개통되고 그 역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비로소 대전은 근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경부 철도는 일제에 의해 한반도와 대륙 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설계되었다. 1901년 기공식을 한 경부철도는 순차적으로 노선과 역사(驛舍) 등이 건설되면서 1905년 정식 개통되기에 이르른다. 경부선의 출발은 서울역이었지만 실질적인 출발역할을 한 것은 부산역이었다. 한반도와 대륙침략을 수단으로, 곧 제국주의 일본의 필요성에 의한 수단으로 부설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경부선이 개통되었을 때 대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개통 직후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때의 상황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는 남아 있다. 바로 육당 최남선이 쓴 '경부철도노래'가 그러하다. 이 창가집(唱歌集)이 출간된 것은 1908년(신문관)이다. 그러니까 철도가 개통된 이후 5년 뒤의 일이다. '경부철도노래'는 일본인 오오와다 타케끼(大和田建樹)의 '만한철도가(滿韓鐵道歌)'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칭은 비슷했지만, 그 동기나 결과는 현저하게 달랐다. '만한철도가'는 조선과 중국 동북부 지역의 지리를 알리고자 한, 세계지리의 차원으로 기획되었는데, 이는 곧 일본의 대륙침략을 돕기 위한 방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경부철도노래'는 우리 국토에 대한 이해와 이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서울을 가려면 많은 시일이 걸리던 것이 하루면 가능했으니 그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숨겨진 국토의 곳곳을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에서 창작되었다..
'경부철도노래'는 7.5조로 된 시가로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나 인근의 명승고적(名勝古蹟)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전의 모습도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마미 신탄 지나서/태전(太田)에 이르니/목포 가는 곧은 길 예가 시초라/오십오 척 돌미륵 은진에 있어/지나가는 행인의 눈을 놀래요"(29장). 대전과 인근 논산이 소개된 것이 이채롭거니와 마땅히 소개할 역사 지리가 부족했던 탓인지 대전은 단 2줄로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였던 최남선의 눈에 비친 대전의 모습은 비교적 정확한 것이었다. "목포 가는 곧은 길 예가 시초", 곧 교통의 중심점으로 대전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남철도가 완공된 것이 1914년이다. 그리고 그 기점과 종착역은 대전과 목포이다. 서울과 목포가 아닌 것이다. 최남선은 "목포 가는 곧은 길"이라 했으니 철길을 두고 한 말은 아니다. 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철길과 육로길 모두 대전은 목포로 가는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대전은 목포와 부산으로 가는 길의 분기점에 놓여 있었고, 그 상징성을 갖는 도시였다. 그리고 이 지리적 장점으로 인해 대전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는 대륙으로 가는 국제열차가 일주일에 두 번 정차하기도 했다. 국내 지리와 세계 지리의 한 축을 대전은 온전히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통의 결절점으로 출발한 대전은 인구대비 가장 많은 대학이 있는 도시이고, 또 과학 두뇌가 많이 운집한 연구 단지를 두고 있다. 정부 3청사의 고급 공무원이 다른 어떤 도시보다 많거니와 깨어있는 시민 또한 넘쳐난다. 이는 대전이 비판적 지성의 요람이 된다는 뜻이 된다. "어디 사느냐"고 할 때, "대전에 산다"고 하면 "엘리트 도시에서 사는군요"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에 미묘한 흥분이 느껴지거니와 대전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교통은 흐름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엘리트 집단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대전은 지리공간이 개방되어 있고, 지식공간 또한 열려있게 된다. 분열이나 갈등은 흐름이나 소통에 의해 초월될 수 있다. 따라서 시대를 이끄는 힘의 중심점이 대전이라는 말이 가능해진다. 국제열차가 다시 출발해야 할 곳, 강산(江山)을 이끌어 갈 빛이 어리는 곳, 이곳이 바로 대전이다. /송기한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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