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단장 |
제사로 인한 종교간의 갈등도 제법 심각했다. 조선 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갈등이다. 모친상을 당한 천주교 신자 윤지충이 천주교 방식대로 신주단지 없이 장례를 치렀다. 산 사람 이상으로 소중히 여기던 신주를 없앤 행위는 상상도 못할 불효였다.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던 조선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효를 무시한 천주교와 천주교 신자는 금수와도 같은 존재가 됐다.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이후로 천주교 신자 상당수가 피해당했다. 제사 때문에 피해 당한 천주교가 오늘날 제사를 용인하며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이러니다. 부모에 대한 제사가 단순 공경의 예일 뿐 우상숭배가 아니라 판단한 것이다.
제사 문제로 인한 종교 갈등은 구한말 또 일어났다. 이번엔 기독교와의 갈등이다. '애매 무리한 기독교의 희생자, 남편이 예수교를 믿고 상식(上食)을 폐한 결과 마누라가 대신 죽어'란 긴 제목의 기사가 동아일보(1920년 9월 1일자)에 실렸다. 유교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한 경상북도 영주에 사는 어떤 가장이 예수를 믿으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영전에 아침저녁 상식(제사)을 중단했다. 남편의 불효는 곧 자신의 잘못이라며 부인이 대신 속죄한다며 물에 몸을 던진 사건이다. 사건을 접한 당시 기독교인이자 민족지도자 월남 이상재의 말이 인상적이다. "어떤 종교든 부모를 저버리라는 가르침은 없다. 패륜은 가장 큰 죄악이다. 부모도 모르는 패륜자식이 기독교를 믿은들 똑바로 믿을 수 있겠나." 영주의 가장을 나무라는 소리다. "신주를 모시고 거기에 길흉화복과 생명까지 맡기며 절하며 비는 것이 문제이지,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며 행하는 예식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제사는 효성의 산물이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적합하다고 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제사를 우상숭배라며 용인하고 있지 않다. 일부 교단에서 넓은 의미의 공경으로 이해하며 눈감아 주는 경우는 있어도 본격적인 승인은 아니다.
죽은 자에 대한 의식이 우상숭배라는 이유 때문이다. 일찍이 공자는 기왕에 제사 지낼 거면 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如在) 생각하고 진중하게 지내라 했다. 상당수가 절대적 존재로서 조상신을 생각하기보다는 형식적 절차로 생각하고 건성건성 지내기 때문에 한 말일 것이다. 제사의 핵심은 진실한 마음에 있다. 부모님이 계신 것처럼 생각하며 회고하고 추모하는 것이 제사라면 제사는 자연스런 효심의 한 표현이다. 이상재의 말처럼 길흉화복에 생명까지 비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면 제사는 부모공경의 한 표현 방식이다. 살아계신 부모에게 하는 절은 공경의 표현이고, 죽은 부모에게 하는 절은 우상숭배라면, 논리적인 문제가 따른다. 만일 그렇다면 현충일과 각종 행사 때마다 하는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은 우상숭배인가? 기본예절인가? 큰 절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면 목례는 절이 아닌가?
큰 절도 절이고 목례도 절이라면, 또 그것을 이해하고 용납한다면 종교간 제사로 인한 갈등은 부질없다. 돌아가신 분들 기리는 장소에서 큰절은 효이고, 목례는 불효라는 말도, 또 큰절은 우상숭배고 목례는 예라는 말도 설득력도 합리성도 없다. 다종교 다문화 사회에서 큰절과 목례, 모두가 소중한 예이고 효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차원에서 서로를 이해한다면 효와 예가 이 나라를 하나 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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