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목계나루터 옛모습. (사진= 김영복 연구가 소장 자료 제공) |
가는 길에 노란 산수유와 하얀 목련이 새초롬한 눈빛으로 길 떠나는 나그네를 반긴다.
충주는 물[水]의 고장이라 할 만큼 27.5억㎥의 담수 능력을 갖춘 충주호가 있는 수량이 풍부한 도시다.
이렇듯 인공 호수인 충주호는 남한강 상류 지역인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 일대에 걸쳐 있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이다. 충주호는 충주 계명산 아래에 건설된 충주댐의 본 댐에서 멀리 단양 도담 삼봉에까지 이르는 광활한 호수를 이루고 있다.
충주호로 향하던 필자는 이정표에 나타난 목계나루터라는 이정표에 꽂혀 차를 목계나루로 차를 돌렸다. 국토를 가르는 크고 넓고 긴 유일한 물길 이란 고구려 말 '아리수' 그 물길의 중심이 바로 충주 목계(木溪)나루다.
목계나루(木漢律)는 우리나라 대 하항(河港)의 하나였다. 특히 영월과 제천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중원군에서는 가장 큰 동네였다. 충주시(舊 중원군) 엄정면嚴政面) 목제리에서 가금면(可金面) 가흥리(可興里)로 건너 앙성면(仰城面)을 지나 경기도 장호원(長湖院)으로 이어지던 나루터로 과거에는 세미(根米)를 운반하던 가흥창을 끼고 오르내리는 하항으로 당시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목계나루의 교역 물자는 서울에서 새우젓, 조기, 소금, 미역, 고등어, 설탕, 광목 등이 들어오고, 목계에서는 쌀, 보리, 팥, 콩·조·담배, 배, 나무 등이 나갔다.
새우젓과 소금은 마포에서 싣고 왔으며, 한편 목계에서 곡물과 담배들을 실은 배는 서울 서빙고로 가고 나무는 영월과 충주에서 목계로 들어오며, 떼(뗏목)에 실어서 광나루로 가서 팔았다. 옛목은 장마가 져서 물이 적절하게 있을 때 많이 내려간다고 한다.
목계에 들어온 물자는 영월, 문경, 단양, 제천 등지로 나갔다. 이처럼 뗏목꾼들은 산업의 유통에 큰 기여를 해 왔다.
고려시대 지방의 조세를 받아 보관하다가 중앙으로 수송하기 위해 수로 운송 체계인 조운제(漕運制)의 12조창의 하나인 충주에 덕흥창이 있었고, 조선 전기에 설치된 경원창은 이보다 남쪽인 창동리 금정마을에 있었다.
1461년(세조 7) 4월 경원창에 화재가 발생했고, 또한 목계와 가흥 사이 강에 막흐레기[莫喜樂灘]란 여울이 있어 배가 왕래하기가 위험하여 1465년(세조 11) 하류에 위치한 가흥으로 조창을 옮기고 가흥창이라 하였다. 가흥에서 가장 가깝고 배가 정박하기에 알맞고 제천과 원주, 충주로 통하는 길목인 목계 일대에 배를 정박하게 되고, 특히 사선이 목계에 정박하여 상행위를 하게 되자 1750년대 내륙의 상항(商港)으로서 가흥은 기타 강촌(江村)보다 번창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년~1836년)은'열수(洌水 한강(漢江)) 위쪽으로는 오직 여주(驪州)의 백애(白厓), 충주(忠州)의 목계(木溪)가 좋은 곳으로 일컬어진다.'라고 했으며, '동쪽으로 수운담(水雲潭)에 정박하니, 이곳은 수륙(水陸) 상인들이 모여 드는 지역으로 들어가 보니 좋은 술과 아름답게 단장한 계집이 마치 충주(忠州)의 목계(木溪)와 같았다.'-『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14권, 22권-라고 하였다.
심지어 다산(茶山)은 1797년 4월 경기도 양근 부근을 배로 지나면서 지은 시에 "술파는 배가 날듯이 달리어라. 처음에는 인정으로 술을 권하여, 전혀 돈을 따지지 않는 것 같네"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가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이들 배를 상대로 술을 파는 배도 생겨났다.
『택리지(擇里志)』에도 "한양의 여러 강촌은 앞산이 너무 가까우며, 충주는 금천과 목계 외의 나머지 강촌은 다 쓸쓸한 촌락이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목계의 지형은 풍수지리상 삼태기형에 속하므로 이곳에서 돈을 모아 외지에 나가 쏟아야 잘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목계에서 돈을 벌면 부자가 되지만 그곳에서 오래 거주하면 돈이 점점 사라지는 지세라고 한다.
조선시대 목계가 중심이 되었던 목계와 용산 간의 뱃길은 1913년 내국통신주식회사가 8척의 선박으로 용산에서 충주의 탄금대 구간으로 화물 수송을 개시함으로써 용산서 충주까지 종착점이 목계가 아닌 탄금대로 바뀌었고, 1913년 충주에 자동차가 들어오고 1928년 조치원에서 충주까지 충북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목계는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한동안 800여 세대가 살며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강배 체험관. (사진= 김영복 연구가) |
강배체험관에는 옛날 목계나루의 역사와 이야기들과 목계나루터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게 많은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체험관이기도 하다.
체험관 벽에 붙인 사진 중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 있다.
바로 '행장 떡국'과 '갓채', 그리고 '참매자조림'이다.
당시 목계나루에서는 길을 떠나는 사람이 행장(行裝)을 갖추고 먹는다는 '행장떡국'이 유명했는데, 이 떡국은 충청도 특유의 날 떡국 즉 쌀가루를 반죽하여 수제비처럼 납작하게 하여 뚝뚝 떼여 넣는 떡국이다. 특히 갓무를 이용한 갓채는 목계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즐겨 먹었다고 한다. 갓채는 추석·설 등의 명절이나 잔치 때 만들어 먹으며 향수를 달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갓을 수확하여 밑동을 잘라서 보관하면 가을, 겨울에서 봄까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갓채 만드는 법은 갓 잎을 다듬고 갓의 밑동을 씻은 뒤 곱게 채 썰어 식초·소금·설탕·참기름을 넣고 버무린다. 채 썬 갓 밑동을 밀폐된 병에 넣어 미지근한 곳에서 하루 정도 발효시킨다. 갓채는 편육이나 육류, 생선 요리와 함께 곁들여 먹으면 더욱 좋다.
지금은 '목계별신제'등 문화제 행사장에서나 맛 볼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강배체험관 관리인에게 혹시 이 음식들을 맛 볼 수 있는 음식점이 있느냐고 물으니 '참매자조림'을 하는 집은 가까이에 있다고 한다.
비내섬 억세밭.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목계나루에서 남한강 상류 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섬 전체가 남한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강과 억새를 한꺼번에 탐방할 수 있는 억새 명소라고 한다.
비내섬에 들어가 보지는 않고 예약해 둔 '참매자조림'을 하는 실비집을 향했다. 필자가 찾은 요일이 목요일인데도 점심때가 되어서 그런지 손님들이 차들이 주차장에 제법 눈에 띈다.
'참매자'라는 민물고기 솔직히 필자도 처음 들어보는 고기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 사람외에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이 '참매자'가 어떤 고기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대충 "모래무지 와 같은 고기"라고 하면 "아~~~"라고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잉어과 모래무지아과에 속한 민물 어류의 일종. 대체로 가까운 친척인 모래무지나 누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참매자'는 모래무지 같은 고기가 아니고 엄연히 족보가 있는 민물고기다.
이 민물고기는 충주지방에서'참매자'라고 부르지만 참마자(Hemibarbus longirostris)라고 한다.
참마자는 날모자, 돌마주, 뗏마주, 똥마주, 뜬모, 뜰마, 뜰마자, 뜰마주, 뜰모자, 뜸마주, 쯤모자, 띰마디, 마두, 마디, 마자, 마재, 마주, 마지, 매자, 매재, 매주, 매자, 모자, 모재, 밀마, 밀마주, 보리매자, 차무치, 참마두, 참마디, 참마조, 참마주, 참마지, 참매자, 참매주, 참메조, 참모도, 참모자, 참모주, 참모지, 참모치, 참무지, 창모주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농정가(農政家), 저술가인 풍석(楓石) 서유구 (徐有, 1764년~1845년)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전어지(佃漁志)에는 마지로 소개되어 있으며, 몸은 둥글고, 머리는 크며, 주둥이는 약간 뾰족하고, 백색 바탕에 흑점이 있으며, 길이는 3 ~4치(9 ~12cm)이고, 강이나 호수, 시내, 못에서 살며, 파리와 지렁이를 잘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 중에서 흑점이라고 표현한 것은 흑점열을 가리킨 것으로 보이며, 현재도 마지나 마디라는 방언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참매자 조림.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남한강에서 많이 잡히는 참마자 등 민물고기 음식이 발달하였다. 목계솔밭은 이름난 관광지로 백중 때는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 여러 가지 음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실비집의 '참매자조림'은 뼈가 부드러워 무, 감자, 시래기를 깔고 양념장을 넣어 조림을 했는데, 양념 맛이 맵지도 않고, 참마자에 맛이 베어 입안에 착 감길 정도로 맛있다.
참매자 조림.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사실 당시는 '참매자조림'이 아니라 탕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에서 온 손님이 국물을 싫어하니 조림을 해 달라고 하여 그때부터 하기 시작한 것이 탕보다 조림이 더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참매자조림'은 한여름과 어름이 어는 한 겨울에는 맛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참매자조림' 맛을 보려면 미리 전화해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참마자가 아니라도 민물고기 좋아하는 분들은 '메기조림'이나 '메기매운탕''잡어매운탕''빠가매운탕'을 즐겨도 좋을 듯싶다.
참마자는 이외에도 매운탕은 물론 뼈가 부드러워 튀김을 해도 좋고 도리뱅뱅을 해 먹어도 좋은 음식이다.
참마자는 원기를 돋우고 숙취해소에 좋으며, 빈혈 예방과 노화 예방에 좋은 저지방·고단백 저칼로리 식품이다. 이러한 참마자조림은 칼슘과 단백질이 풍부한 사계절 별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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