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온천 명맥을 이어온 유성호텔이 이달말 영업을 종료한다. 고밀도 도시개발로 초고층 주상복합이 즐비한 온천지구 너머 계룡산이 보인다. (사진=임병안 기자) |
일제강점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엽서봉투에 철도과 승용차를 이용한 유성온천이 안내되어 있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제공) |
대전 유성 온천지구는 고밀도 도시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면서 전통적으로 쌓아 온 온천 기반의 관광시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온천수 대중목욕 시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던 유성네거리 홍인장이 2011년 폐업하고 지상 29층 주상복합 주거시설이 들어선 것을 계기로 2017년 12월 리베라호텔에 문을 닫았고 2018년 아드리아호텔도 영업을 종료했다. 옛 리베라호텔의 주차장으로 쓰이던 부지는 이미 도시형주택이 들어섰고, 리베라호텔 부지에서도 19층 주거용 오피스텔 건축을 시작했다. 유성관광특구에 한 해 관광객 1000만 명이 다녀가던 때와 다르게 쇠락한 이유를 고밀도 도시개발에서 찾는 시선도 있다.
대전에서 온라인 영문뉴스를 서비스하는 워크인투코리아 강대훈 대표는 그의 책 '도시는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가'를 통해 유성이 갖고 있는 고유한 경관이 사라진 데에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강 대표는 중도일보와 만나 "지형이 없어지면 기억이 소실되는데 사람의 기억은 장소에서 복원되기 때문"이라며 "유성 봉명동 일원은 온천지구이면서 용적률을 상향하고 고도제한을 풀어줘 40층짜리 주상복합 유성자이의 건축 이후 온천지구의 마천루 건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용적률 880%를 웃도는 고밀도 주상복합 아파트가 온천지구 북쪽에 들어서면서 계룡산 경관을 완전히 가렸고 전체 29층 높이의 푸르지오시티, 35층 높이의 사이언스타운도 온천지구를 압박하고 있다. 강 대표는 빡빡한 건물과 자동차 소음에 지쳐가는 시민들에게 빈틈없이 고밀도 개발 이뤄지는 유성은 휴양지로 남기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유성호텔이 문을 닫은 후 그나마 남아 있는 유성의 온천문화는 자연스럽게 국군휴양시설인 계룡스파텔로 옮겨갈 것인데 이곳에 고유성을 보존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강 대표는 "유성 온천지구의 고유의 지형을 무너트린 지금, 계룡스파텔 부지는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며 "이곳에 워터파크를 만든다면 온천문화를 완전히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휴양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구단위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전의 매력 유성온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19년 대전방문의 해를 맞아 '대전 유성온천'을 주제로 전시회가 열렸다. 대전에 여러 관광자원 중 역사와 결합해 새로운 매력으로 서울시민들에게 대전을 홍보하기 가장 좋은 수단으로 유성온천을 소개한 것이다. 대전시립박물관과 공동 기획한 당시 전시에서 철도 부설과 유성온천의 개발이 연계되어 이뤄졌다는 발표가 처음 나왔다. 1923년 20여 개의 객실과 공동 욕장을 갖춘 봉명관(鳳鳴館)이 유성에 개장했을 때 철도 민간 운영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대전역에서 유성온천을 잇는 버스의 운행을 시작했고, 호남선 철도가 이어지는 주요 길목에 간이역을 설치해 여행객들을 유성온천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내 일찍이 유성온천에서 노닐었는데 손꼽아 세보니 그것도 지금 삼사십년이 되었네. 그때 땅 주인은 자주 다정히 문안하였고 향관은 진중하게 욕조를 제공했었지."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인 서거정의 시문집인 사가집에서도 유성온천의 수려한 풍경과 온천욕의 추억을 노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지질조사요보에 유성온천공 개발을 위해 굴착기를 가설한 사진이 게재됐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제공) |
유성온천을 주제로 최초 개발과 근대시대 변화를 살핀 논문 '일제하 유성온천의 개발과 대전 지역사회의 변화'에서 저자 고윤수 대전시 학예연구사는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는다. 유성온천을 개발한 주인공이 친일협력자 김갑순이 아니라는 것과 당시 신온천지구와 구온천지구로 구분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온궁(溫宮)이라 불린 행궁까지 설치됐던 온양온천과 달리 유성온천 즉 당시 유성면 봉명리 일대는 너른 논밭이었다. 1904년 대전역 개설을 전후로 대전에 정착했던 일본인이 개발했다. 위로 조금씩 흘러나오던 온천수의 탕구를 찾고 관정을 만들어 그것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일은 적지 않은 인력과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온천수 용출에 성공한 대전의 일본인 유지들은 1914년 '대전온천'이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해 온천 사업에 뛰어들었다. 1921년 겨울, '구온천' 즉 대전온천(주)에 이른바 '공주 갑부'로 알려진 김갑순이 대전온천(주)의 주식을 사들여 최대 주주가 되면서 회사의 명칭을 '유성온천(주)'으로 변경했다. 온천의 소유와 경영이 대전의 일본인 유지들에서 김갑순 중심의 공주의 유지들에게로 옮겨졌다. 다만, 김갑순의 당시 유성온천의 유성호텔과 지금의 유성호텔은 별개의 것으로 25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지금의 유성호텔 건물은 1966년 세워진 것으로 김갑순의 유성호텔을 포함한 유성온천의 100여 년 역사를 모두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컵, 찻잔세트까지 보존과 상품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오랜 호텔이 문을 닫았을 때 이를 아쉬워하고 일부라도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경북 경주에서 운영하던 콩코드 호텔이 2016년 문을 닫았다. 30년 동안 특1급 호텔로서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대표 호텔 중 하나였다. 1979년 경주 보문관광단지에 개업에 테라스가 딸린 레이크 뷰를 자랑했으며 온천수 및 수영장, 사우나, 연회장, 미용실까지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췄다. 폐업한 이후 콩코드 호텔의 Y자형 건축양식의 로고 마크가 들어간 오리지널 비품은 기념품(굿즈)가 되어 전시되고 상품이 되었다. 또 제주 칼호텔은 1974년 준공해 48년간 제주시 원도심의 상징성 가진 호텔이었으나 경영악화로 2022년 4월부터 영업을 중단한 상태다. 종사자들의 생존권과 지역상권 침체 문제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로 기존 호텔을 헐어 주상복합아파트를 건설하는 계획도 아직 제자리 걸음으로 호텔은 빈건물로 남아 있다. 호텔이 영업할 때 사용된 의자, 식탁류, 컵, 찻잔세트, 치약, 드라이기, 수건, 욕실욕품 등이 굿즈로 다시 수선돼 추억의 상품으로 이용된 사례도 있다.
대전시도 유성호텔에 대한 기록화 사업을 착수했다. 유성호텔이 갖고 있는 고유성과 시민들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호텔 운영사와 협의해 옛 설계도 등을 확보했다.
대전시 관계자는 "유성호텔에 대한 시민들의 기억을 보존하고 온천문화를 남기는 차원에서 기록화사업을 시작해 호텔에 얽힌 이야기를 발굴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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