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따라 동생이 몇 년 전에 던졌던 그 한 마디가 왜 이리 머릿속에 되살아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지난 순간의 한 마디였지만, 그게 바로 물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세인들의 모습이어서 그런 거 같다.
그 해는 바로 코로나가 창궐하기 한 해 전의 가을이었다.
노심초사하여 출간한 처녀작 수필집 < 발신인 없는 택배 >를 들고 선산에 계신 부모님과 아내 앞에 바치려고, 열 일 제쳐 놓고 고향으로 향했다.
낯익은 고향 마을에 들어서자 논배미의 황금 물결치는 들판이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하지만 선산 가는 길 양 옆 논배미의 누렇게 익은 볏논은 바라볼수록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거였다.
비바람으로 결실 직전의 벼가 엎쳐서 논배미에 드러누워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논들의 벼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논이 많았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여기저기 엎쳐 쓰러져 있는 벼 논배미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농사일을 하고 있는 동생이 한 마디 했다.
"논배미의 벼를 보고 있노라면, 논 임자들의 인성을 한 눈에 보는 것 같아요"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뒤를 이어서 하는 말이, "논배미마다 많이 엎친 벼는, 주인의 욕심으로 비료를 많이 줘서 그렇게 됐고, 엎치지 않은 논은 주인이 욕심을 안 부려 비료를 적당히 주었기에 엎치지 않은 거요."
그리고 보이는 위아래 다랑이 전후좌우 논 할 것 없이 엎친 논, 안 엎친 논의 주인 이름을 하나하나 대는 거였다. 내가 알만한 이름들이어서 확인해 보니 욕심쟁이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게 사는 사람을, 논배미의 벼들이 그대로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족집게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논배미의 벼가 많이 엎치고, 덜 쓰러지고, 안 엎친 걸로 주인 욕심의 있고 없음이 판별된 셈이었다. 예서도 부메랑이란 걸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논 주인이 욕심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바로 벼가 많이 엎치고, 덜 엎치고, 안 엎친 볏논인가로 판별되는 거였다. 엎친 벼에 비례하여 주인의 욕심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았다.
농작물에 거름을 주고 비료를 뿌리는 것도 욕심이 앞서서는 안 된다. 빨리 키워 거두려는 욕심으로 비료를 많이 주게 되면, 농작물이 약해져 비바람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온상에 자란 꽃보다는 산야의 비바람에 시달리고 자란 야생화가 자생능력이 강하고 튼튼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농사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논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벼가 잘 자라는 줄로 생각한다. 하지만 논에 항상 물이 차 있으면 벼가 약해져서 작은 태풍에도 잘 넘어진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가끔씩은 물을 빼주고 논바닥을 말려야 벼가 튼튼해진다는 걸 알아야 한다.
온상과 비닐하우스 안에 농작물이나 화초를 재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화초나 작물을 속성으로 자라게 해서 빨리 돈 벌 욕심으로 온상이나 비닐하우스 안의 온도를 계속 올려서는 안 된다. 욕심을 줄이지 못하면, 그 안에 있는 식물은 모두가 찜통의 열로 말라죽게 될 것이다.
온도를 높여주는 것도 신경 써야 할 일이지만, 환기통이나 바람구멍을 만들어 덥혀진 공기를 적당히 빼낼 줄도 알아야 한다. 농사를 짓는 데도 '비우고 채우는 것'을 잘 해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 이것은 농사뿐만이 아니다. 인생살이 과정에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의 마음도 그릇과 같아서 비워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채워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살이는'비우고 채우는 과정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덧셈 곱셈을 해서라도 채워 주고,'인간성 상실'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뺄셈 나눗셈을 해서라도 비우든지 적게 해 주어야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내 고향 시골엔 어머니 친구 되시는 어른 한 분이 살아 계셨다. 어머니 생각으로 고향에 갈 적마다 찾아뵐 때면 그렇게 반가워 하셨다. 별것도 아닌 고기 한 근에 그렇게 고마워 하셨다. 당신의 자식 같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누런 종이 회부대에 내가 좋아하는 머위를 부대가 터질 만큼 담아주셨고, 그것도 부족하여 손수 농사지은 검정콩 한 됫박을 비닐봉지에 싸 주시곤 했다.
농사 일로 거칠고 앙마딘 손으로 챙겨 주셨던 검정콩 비닐봉지가 지금도 날 울리고 있다.
일찍이 고아가 된 나에게 굶주렸던 어머니 사랑을 대리만족하게 해 주셨던 분이셨다.
'비우고 채우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금옥만당(金玉滿堂: 사람의 욕심을 다 채우는 것보다는 적당하게 그치게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란 말이 떠오른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 차 있으면 넘보는 눈들이 많다. 가득 찬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심은 어리석은 짓이다. 욕심은 늘리고 채우기보다는 적당할 때 멈추거나 비우는 게 후환이 없다.
채울 대상은 수 없이 많지만 '사랑과 따듯한 가슴, 용서하는 마음, 관용'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비울 것도 다수겠지만 '과욕과 미움, 질투, 이기심' 같은 것은 아낄 게 못 된다 하겠다.
어머닐 대신 해서 채워 주셨던 또 다른 어머니 손길이, 머위 부대, 검정콩 비닐봉지가 이 나이 되도록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상생을 하기 위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삶의 선택지엔 수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부귀, 명성, 권력, 사랑, 베풂, 배려, 관용, 이 중에서 '당신은 뭘 비우고 뭘 채우시겠습니까?'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남상선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