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용 변호사 |
미국에서 처음 차를 인도받아 운전하던 날이 생생하다. 별 긴장감 없이 키를 건네받아 운전을 시작했는데 낯선 길에서 잠깐 속도를 늦추고 지체하자 뒤에서 득달같이 경적 소리를 울려댔다. '한 번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은 사치였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30분 남짓 짧은 시간에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여러 번 경적 소리에 시달렸으니 말이다.
미국은 특별한 신호가 없는 한 비보호 좌회전이 일반적인데,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기 위해서는 교차로 한가운데까지 나가서 기다리다가 반대 방향에서 황색불이 들어와 차가 멈추면 즉시 좌회전을 해야 한다. 이걸 모른 채 기다리다가 좌회전을 못한 채 빨간불로 바뀌자 뒤쪽의 차들로부터 동네가 떠나가도록 웅장한 경적 소리 세례를 받았던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답게 복잡한 길이 얽힌 이곳은 내비게이션이 좌회전을 안내하면 왼쪽에 세갈래 길 정도가 나타나는 일이 허다하다. 아무리 15년 무사고 경력으로 운전이 손에 익은 나로서도 '살짝 좌회전, 급한 우회전'같은 모호한 안내 소리를 따라 운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보스턴의 운전자들은 이런 개인 사정 따위를 배려해 줄 생각은 전혀 없는 듯하다. 잠깐 머뭇거리거나 주저하고 있으면 여지없다. 나를 향해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시내를 운전하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벼락같은 경적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당황스런 마음에 찾아보았더니 역시나, 어느 보험사가 안전운전 도시 순위를 매겼더니 200개의 미국 도시 중 보스턴이 199위를 차지했다거나, 미국 난폭 운전 도시 3위에 이름을 올렸다는 등의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보스턴 만의 문제도 아닌 듯 하다. OECD 통계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미국의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의 비율이 11.6명으로 우리나라 6명의 거의 두 배에 이른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미국의 운전문화가 그리 선진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난폭 운전자들도 꼼짝 못하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난폭 보행자'들이다. 보행자가 신호를 지키는 모습은 어딘지 어색하다. 차가 오지 않는데도 빨간불이라고 길을 건너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보스턴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차량 통행이 상당한 곳에서조차 무단횡단을 하는 모습을 수시로 볼 수 있다. 교통신호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 차들을 기다리게 한 채로 천천히 길을 건넌다. 그래도 손인사라도 건네며 웃는 모습을 보면 정겹기도 하다.
보행자로 길거리를 다닐 때에는 조금 지나치다 싶은 양보가 낯설게 느껴진다. 차가 지나간 뒤에 건너기 위해 길가에 서 있으면 굳이 속도를 줄여 차를 멈춘다. 지나가는데 몇 초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편도 2차로의 넓은 도로에서 상당한 속도로 달려오던 차들이 멈춰서 기다리는 것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운전자로서 이곳 문화에 맞춰 양보를 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당당히 튀어나올지 모르는 보행자들을 신경쓰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적응이 되고 나니 나름 양보의 즐거움도 쏠쏠하다. 보행자로서도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덤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비교하면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1/5로 줄었다고 한다. 아직 OECD 평균에는 약간 미치지 못한다고 하나 매년 개선되는 수치는 희망적이다. 정확한 비교 통계는 없지만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인구 10만 명당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미국 1.85명, 우리나라 2.2명 정도로 추산된다. 보행자에 대한 양보의 문화도 보다 널리 보급된다면 사고로 아픔을 겪는 일도 더욱 줄어들을 것이다. 나도 우리의 아이들도 보다 길을 나서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해 지기를 바래본다.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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