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 한국재난역사연구소장(문학박사) |
1987년 88올림픽을 앞두고 구급차는 시민들의 응급수단으로 거듭 탄생했다. 구급차의 필요성은 위급환자가 자주 발생할 때마다 강조돼 오던 주요한 사회적 관심이었다. 그런데 구급대의 운영은 처음은 아니었다. 50년 전인 1938년에 이미 경성구급차가 왕성한 구급활동을 했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해방 이후 사십년 가까이 구급활동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묻혀져 있었던 셈이다.
우리나라 구급차의 효시인 경성구급대는 1938년 10월 10일부터 시작됐다. 당시 경찰 산하 기관이었던 '경성교통안전협회' 는 경성모터스에 의뢰해 6000원의 예산으로 구급차를 제작했다. 4인가족 생활비가 80원이었던 당시 6000원의 금액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경성구급차는 중상환자 2명 경상환자 3명을 이송할 정도의 크기였다. 구급차의 외관은 백색의 지프차로 구급차를 '백(白)자동차' 라고 불렀다.
1939년 경성소방서 구급차와 간호부들.(사진출처 : 조선소방 책자)/김상욱 박사 제공 |
구급차가 활성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전화의 보급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전화선이 개통된 것은 1885년 서울과 인천을 연결한 전신선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된 것은 그보다 늦은 1930년이었다. 1930년 5월부터 경성소방서에 화재 신고를 접수하는 6명의 수보 요원이 배치됐다. 1935년 10월 1일 경성중앙전화국 본국의 전화교환 방식이 자동식으로 바뀌어지면서 '119' 번으로 화재신고가 통일된 것이다.
당시 통화당 1회 요금은 3전 정도였는데 구급차 요청 신고는 무료였다. 당시 군청 근무자의 숙직비가 80전, 한국인 노동자의 일당이 1원이었음을 감안하면 비싼 통화 요금에도 화재신고나 구급신고는 무료로 했던 것이다.
경성구급차가 도입되기 5년 전인 1933년 일본 요코야마 소방서에서는 구급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구급차의 효과성이 입증되면서 일본 각지 소방서에서는 구급대의 운용이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일본에 비해 5년 늦은 도입이었지만 경성구급대는 교통사고 현장에 신속히 출동해 귀중한 인명을 살리는데 몫을 톡톡히 했다.
1939년 10월부터 다음 해인 1940년 8월까지 10개월 동안 경성구급차가 이송한 환자는 100여 명에 달했다.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1일차 기사에서 구급차 사용이 무료임을 보도했다.
당시 통화당 1회 요금은 3전 정도였는데 구급차 요청 신고는 무료였다.
당시 구급차 이용 사례를 보면 1940년 5월 28일 오후 세시 50분쯤 경성역에서 효자동으로 가던 전차 72호 지붕의 쇠가 떨어져서 전차를 기다리던 경성사범학교 강습생인 김종두가 머리에 부상을 입었는데 경성구급차가 신속하게 출동해 적십자 병원에 이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40년 2월 7일 저녁 10시 40분경 경성 택시 자동차가 손님 네명을 싣고 달리던 중에 초종로에 있는 초교(初橋) 에 부딪쳐 자동차가 부서지고 승객이 중상을 입었는데 경성구급차가 신속히 출동해 환자 네 명을 경성제국대학 병원으로 이송했다는 동아일보의 보도가 있다. 이채로운 것은 이번 사고는 택시 운전자가 만취한 상태에서 자동차를 운전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음주 운전은 사회적 문제였던 셈이다.
참고문헌
김상욱, 『한국근대소방관의 탄생』, 민속원, 2021.
김상욱, 「일제강점기 소방 기구의 변천과 역할」, 한국 행정사학회, 2018.
國書刊行會, 『(寫眞圖設)日本消防史』, 1984.
朝鮮消防協會, 『朝鮮消防』, 1939.
『동아일보』,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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