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단장 |
이 일을 접하며 우리가 우리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는 몰주체적 사고는 없는가 반성했다. 서구의 대가가 언급하니까 그때서야 우리 것이 위대하다 생각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문제는 대가 의존적 사고로 인해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이다. 학자는 글로 말한다. 오랜 연구성과로 발표한 학자의 말은 그래서 의미 있고, 학설로 남는다. 학자가 한마디 글을 쓸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다. 여기서 글과 말의 차이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글은 영속적으로 남고, 말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연구자들이 전문가의 입에서 나온 말보다는 논문이나 저술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효, 동양문화의 정수가운데 하나다. 오랜 세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로 내려왔다. 명절 때마다 고난의 길임을 알고도 떠나는 민족대이동의 중심에는 효문화가 있다. 그런 효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도 생겼다. 날로 사라져가는 효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취지에서 법률도 제정됐다. 체계적으로 관리 감독할 한국효문화진흥원이 설립됐고, 전국 각지의 민간단체도 조직됐다. 전 세계 이렇게 효를 강조하며 장려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세계인들이 이런 한국 효문화에 관심 갖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과 자세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효문화를 우리 것 갖고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굳이 효가 없거나 약한, 그래서 학문적 성과가 없는 서구사회 대가의 입을 빌려 말하지 않아도 된다. 혹 세계적인 학자가 한국의 효문화를 언급했다면 그것이 덕담 수준인지, 연구성과에 따른 결과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주변에 떠도는 한국 효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언급은 상당수가 숙성된 연구 성과물보다는 말로 전달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확대재생산에 따른 과포장도 없지 않다. 구전의 한계다. 전하는 말은 전달자마다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 로댕에서 오뎅, 오뎅에서 뎀뿌라 식의 과포장의 가능성이다. 이렇게 구전된 내용이 언론과 저술에 객관적 근거 없이 언급된 경우도 있다. 서글픈 현실이다.
아놀드 토인비의 한국 효사상 관련 내용이 대표적이다. '인류를 위해 가장 필요한 사상' '서양에도 한국의 효가 전파됐으면 좋겠다.'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국의 효사상만은 지켜라' 등등 토인비가 말했다는 한국의 효사상이다. 냉철한 석학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의심은 가지만, 아무튼 이렇게 엄청난 말로 한국의 효를 칭송했다면 당연히 그의 저술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공개된 기자와의 언론 인터뷰 기사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없다.
출처는 간단하다. 어느 한국인 한 분이 노년에 외롭게 살고 있는 그를 면담하며 한국의 효를 설명하자 이를 듣고서 한 말이다. 듣고 한 말이니 토인비는 한국의 효를 몰랐던 게 분명하다. 노년에 외롭게 사는 석학을 바라보며 그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한국의 효를 자랑했을까. 어찌됐든 이 내용은 면담했던 당사자가 한국의 효를 토인비가 이렇게 말했다고 소개하며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증거능력 없는 '카더라' 통신이 세계 최고 석학의 한국 효사상 칭송이 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 오십페이지 셋째줄'까지는 아니어도 효에 대한 석학들의 언급은 객관적 출처를 요한다. 언급한 내용이 덕담 수준의 말이라면 냉철하게 학문적 가치는 없다. 한마디로 토인비는 한국의 효를 몰랐고, 그의 한국 효사상 언급은 모르고 한 말이니, 그것으로 한국 효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 효문화 그 자체로도 위대한 가치가 있다.
/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