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키지 않는 전화인지라 받질 않았다. 잠시 후에 벨 소리가 그치는가 싶더니, 금세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재차 들렸다. 직감이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어 걸려온 전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 33보 3473 차주 되시지요? >, < 예, 그렇습니다만‥. > 했더니, 자신이 운전 미숙으로 차량 번호판을 살짝 들이받아 약간 이상이 생겼으니 나와 확인해 보라는 거였다.
나가 보니 7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아저씨였다. 운전 차량은 봉고차였다. 옆에는 가족들로 추정되는 남녀 몇 사람이 차에서 내려 서성대고 있었다. 지명(知命)이나 이순(耳順)은 됐을 것 같은 여인 둘에다, 머리 반백이 다된 남자 셋이 동승을 했다가 내려서 심란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친척집에 명절 인사를 왔다가 마치고 돌아가는 참에 지금 같은 불상사를 저지른 것 같았다.
나는, 그들 차량이 충격을 가했다고 하는, 내 승용차 번호판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 다섯 사람의 얼굴은 내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에 초점이 모아졌는지, 말 한 마디 없이 초조한 모습들이었다.
나는 차를 살펴보았다. 차체는 별 이상이 없었으나 차량번호판과 그 언저리가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바라보고 있던 운전자가 입을 열었다. < 얼마 정도 보상을 해드리면 될까요? >, < 보상이라니요! 괜찮습니다. 저도 운전을 하는 사람인데 이런 정도로 마음을 무겁게 해드려서야 되겠습니까? 저 주실 돈 있으시면, 가셔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쓰십시오,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정도 차 흠집이라면 말씀 안 하시고 슬쩍 가셔도 될 만한데. 귀하께서는 너무 정직하셔서 연락까지 주셨으니 참으로 훌륭하시고 감사합니다. 밤이 깊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편안히 가십시오. >
순간 무거웠던 분위기가 해빙기 봄을 맞은 듯한 얼굴들이었다. 초조했던 얼굴들에 환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도 정직한 운전자의 솔직한 고백 한 마디에 마음이 흐뭇했다. 정직한 사람한테서 많은 것을 얻었으니, 차는 조금 손볼 데가 생겼지만 왜 이리 마음이 편안한지 모를 일이었다.
차주는 정직하게 고백해서 자유스런 몸이 되었다. 모르는 척 달아났더라면 두고두고 가책을 받아 마음이 편칠 못했을 텐데 이 분은 진정 훌륭한 인격자였다. 죄 짓고 달아났던 범인들이 자수하는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정직과 양심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상의 선물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정직'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직해서 사업체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의 설립자, 고최태섭 회장의 실화가 떠올랐다. 최태섭 회장의 정직성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의 얘기를 해봐야겠다.
서울에 있는 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작은 규모의 사업 운영을 하던 그는 6·25 전쟁 발발로 한시 바삐 피난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피난길에 오를 준비를 하던 중 그는 자신이 빌린 돈을 은행에 갚아야 할 기일이 다된 것을 알고, 돈을 준비해 은행에 갔다. 전쟁이 나자 사람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뭐든 챙겨서 떠나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반대로 돈을 들고 은행을 찾아간 것이다.
이렇게 전쟁 중에도 정직성으로 신뢰를 얻은 그는, 어려운 시기에도 정직성을 밑천으로 사업을 번창시켜 국내 굴지의 기업가가 되었다. 그 덕분에 급기야는 대한민국이 유리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정직은 신뢰로 통하고 양심과 직결된다. 상대방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정직은 권세와 금력을 능가한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가나 돈이 많은 백만장자도 정직성이 무너져 신뢰가 깨어지면 권세와 부를 잃게 된다. 유명 유수기관에서도 직원을 채용할 때, 우선 정직한 사람을 뽑고 있다. 정직성은 사람을 신뢰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양심인은, 그가 바로, 자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직'은 최상의 무기요, 용기와 힘이 되는 것이다.
'정직'보다 더 좋은 배경이 어디 있을까!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소금 구실을 못한다.
사람도 정직하지 못하면 신뢰성을 잃고, 양심이 무디어져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정직성의 무게는 몇 g이나 될까?
정직은, 권세나 돈으로 해낼 수 없는 것을 이루어내고 있다.
이러하니, 정직보다 더 좋은 배경이 아디 있다 하겠는가?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남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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