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적진을 향해 M60 기관총을 쏘고 있다. (출처:전쟁기념관 아카이브 임일수 기증사진) |
베트남전쟁 헬기 작전을 수행하는 청룡부대(출처:전쟁기념간 아카이브 임익수 기증사진) |
베트남전쟁 당시 사이공(호치민) 시내 (출처:전쟁기념관 아카이브 임일수 기증 사진) |
구정 당일인 1월 30일 새벽 사이공을 비롯해 남베트남 41개 주요 도시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구정 공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수일 전부터 치밀한 작전 속에 잠입해 있던 베트콩은 남베트남 주요 시설들을 공격하며 장악해 나갔다. 평온했던 설날 아침이 악몽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베트콩들은 빠르게 남베트남의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사이공의 미 대관도 로켓포 공격을 받는 등 기습을 당했다. 세계 최강 미국의 대사관이 공격받았다. 다행히 미군의 신속한 대처로 점령은 면했지만,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던 미군의 자존심은 크게 훼손됐다. 구정 공세는 이후 수개월 간 크고 작은 게릴라전과 국지전으로 이어졌고 당해 9월이 돼서야 완전 진압됐다.
미군과 함께 전선을 지키고 있던 한국군도 초반 기습에 잠시 당황했으나 경계를 늦추지 않은 탓에 한 한곳의 진지도 내주지 않고 지켜냈다. 반면 미군은 구정공세를 계기로 자국 내 반전 여론을 불러왔고 이후 미국의 정치 주도 세력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공세를 주도했던 베트콩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훗날 북베트남의 베트남전 승리를 끌어내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피로 물들였던 구정공세의 결과는 참혹했다. 남베트남을 비롯한 미군 등 연합군은 전사 1만 8,324명, 부상 3만 5,212명의 피해를 입었고 북베트남은 전사 4만 5,267명, 부상 6만 1,267 명의 피해를 입었다. 전 세계 유례 없는 구정 설날에 벌어진 참혹한 전투는 민족 말살에 가까운 큰 아픔은 5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금상진 기자 jo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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