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차례는 조상에게 세배한다는 의미에서 '정조다례(正朝茶禮)'라고도 하고 떡국을 올렸다 해 '떡국차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전집(星湖全集)』에 '절일(節日)에는 시절의 음식을 올린다. 정조에는 떡국〔湯餠〕을 올리는데, 떡을 잘라 탕을 만든 것이고, 원양견(元陽繭)도 올리는데, 술을 넣은 반죽을 발효시켜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기름에 튀겨 부풀려 튀밥을 붙인 것이다.'라고 나온다.
가래떡. (사진= 김영복 연구가) |
한편 조선 후기의 대 성리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는 자신의 사형(舍兄)에게 "저는 병의 증상이 한결같이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이제 떡국 한 그릇을 또 먹었으니, 이른바 희년(稀年)도 2, 3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성동(成童 15세)의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가 백발의 나이에 이룬 것도 없이,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이런 경계(境界)를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평생을 돌아보매 한 가지 일도 예전에 지녔던 뜻을 조금이나마 갚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며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지은『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1권 영처시고에 '세시(歲時)에 흰떡을 쳐서 만들어 썰어서 떡국을 만드는데 한난(寒暖)에 잘 상하지도 않고 오래 견딜 뿐 아니라 그 조촐하고 깨끗한 품이 더욱 좋다. 풍속이 이 떡국을 먹지 못하면 한 살을 더 먹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이름을 '첨세병(添歲餠)'이라 하고, '첨세병'을 노래한다.'며 "千杵萬椎雪色團(천저만추설색단)천만 번 방아에 쳐 눈빛이 둥그니, 也能仙比金丹(야능선조비금단) 저 신선의 부엌에 든 금단과도 비슷하네 , 偏憎歲歲添新齒(편증세세첨신치)해마다 나이를 더하는 게 미우니, 吾今不欲餐(초창오금불욕찬)서글퍼라 나는 이제 먹고 싶지 않은 걸 "이라고 읊었다.
손으로 빚은 생 가래떡.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왜 그렇습니까?"하고, 묻기에, "설날에 떡국을 먹지 않았기 때문일세" 하니, 한 주부가,
"비록 나이는 먹지 않았다 하더라도 느는 백발은 어찌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살쩍을 어루만지면서 서글픈 태도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백발을 기뻐한 것은 근심 걱정을 견디지 못하는 데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어찌할 수 없다는 글[無可奈何語]'을 지었다" 하였다'라고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나이를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느냐."라고 하는 데서 유래하여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 부르기도 한다.
떡국의 주재료인 가래떡은 주로 멥쌀로 만드나 영조 32년(1756) 3월 5일 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無不托(무면불탁)이른바 '밀가루가 없이는 떡국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밀가루'로도 떡국을 만들어 먹었던 것 같다.
떡국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황해도는 떡 모양이 조랭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롱박이 한 해의 액(厄)막이 역할을 한다고 여김으로 설날에'조랭이떡국'을 먹는다고 한다.
이 '조랭이 떡국'은 흰떡을 대나무 칼로 동글동글하게 잘라 만든다.
강원도는 떡과 만두를 같이 넣는 '떡만둣국'을 해 먹는데, 떡국에 보리나 잡곡을 섞거나 주머니처럼 생긴 만두는 복을 가져다 준다하여 만두를 만들어 넣어 먹는다.
서울의 떡국은 소고기를 볶아 국물을 낸 '쇠고기떡국'을 만들어 먹는데, 계란지단, 김 가루, 파를 고명으로 올려 먹는다.
'꾸미떡국'과 경북은 불린 쌀을 쪄서 가래떡을 만들어 태양처럼 둥근 모양으로 썰어 끓인 '태양떡국''장 떡국'이 있다.
'끼미떡국'은 경상북도 지역의 독특한 떡국인데, '꾸미떡국'이라고도 불린다. 끼미는 국이나 찌개에 넣는 고기붙이를 가리키는 경상북도 지역의 방언이다. 표준어로는 꾸미이다. 맹물이나 멸치 육수로 끓인 떡국에 조선간장으로 진하게 간을 하여 볶은 소고기를 끼미로 올려 먹는 떡국이다.
'꾸미떡국'은 대구 지역 각 가정마다 만드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소고기만 사용하여 끼미를 만드는 방법과 소고기와 잘게 자른 두부를 같이 넣어 끓이는 방법, 소고기를 먼저 조린 후 구운두부를 따로 떡국에 올려 먹는 방법 등이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다.
생가래떡을 떡국떡으로 자른 모습. (사진= 김영복 연구가) |
경남은 쌀가루를 반죽하여 납작하게 한 다음 구은 후 썰어 넣은 '굽은 떡국'을 만들어 먹으며, 전라도는 간장에 졸인 닭고기로 육수를 낸 '닭장떡국'이 시원하고 감칠맛이 나는 떡국을 만들어 먹는다.
'장 떡국'은 간장과 버섯만으로 감칠맛을 살린 떡국이다.
그리고 제주도는 겨울철 별미인 해초류 모자반( 지역방언'몸')으로 만든 떡국으로 돼지등뼈를 우린 육수에 모자반과 메밀가루와 떡을 넣은 '몸 떡국'을 즐겨 해 먹는다.
우리 충청도는 멥쌀가루를 끓는 물에 익반죽하여 만든 떡에 미역과 들게 즙을 넣어 만든 '생떡국'을 해 먹는다.
충청도의 '생떡국'은 멥쌀가루를 끓는 물에 익반죽하여 오래 치대어 떡가래처럼 길게 만들어 돈짝만큼 썰거나 새알 등의 모양으로 빚어 만든 생 떡을 장국에 넣어 끓인 국을 '생떡국' 또는 '날떡국'이라고 하며, 한자로는 '생병탕(生餠湯)'이라 한다.
구한말 재야 지식인 위관(韋觀) 이용기(李用基·1870∼1933)가 1924년에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는 돈짝같이, 문화공보부가 펴낸『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 충청도 편에는 경단 모양으로 만든 후 납작하게 떡국 모양으로 눌러 만든 사례가 나온다. 장국의 재료로는 쇠고기나 바지락 등을 쓰며, 미역·채소 등을 넣기도 한다. 웃고명으로는 다진 쇠고기, 산적, 계란 지단, 후춧가루 등이 쓰인다.
충청도에서는 설날 음식이기도 하지만 충남 서천군 서면의 설날 당제에서도 생떡국을 제물로 바친다. 이 떡국을 한자어로 편탕(片湯)이라고부른다. 주민들은 한자어가 높임말이라고 생각하여 신령에게 올리는 제물로 부를 때는 생떡국보다 편탕(片湯)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경상도 굽은 떡국. (사진= 김영복 연구가) |
경북 예천군의 통명마을에서 음력 7월의 백중 때 행해지는 풋굿을 보면 "오호라 봉헤야 생떡국 한 그릇 먹고 하세"라는 타작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쌀을 타작하면서 쌀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생떡국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생떡국에 대한 속담도 있는데, "떡도 떡같이 못해 먹고 '생떡국'으로 망한다", "'날떡국'에 입천장만 덴다" 등이 있는데, 전자는 어떤 일이 다 이루어지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이며, 후자는 변변치 못한 '날떡국'에 데기만 하듯이 하찮은 일을 하다가 도리어 손해만 봤다는 뜻이다.
날떡국이라 불리는 충청도 생떡국.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설날에 떡국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부터 설날에 떡국과 함께 만둣국도 먹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 문신인 택당(澤堂)이식(李植1584~1647)의『택당집(澤堂集)』에'정조(正朝)에는 각 자리마다 병탕(餠湯떡국)과 만두탕(曼頭湯)을 한 그릇씩 놓고, 과일은 세 가지 종류로 하고, 포와 혜를 각각 한 그릇씩, 적은 한 접시 세 꼬치를 올린다.'고 적고 있으며, 조선 중기 학자로 삼가현감으로 있으면서 주사(舟師·수군)의 시험관을 맡았던 고상안(高尙顔1553~1623)이 쓴 『태촌집(泰村集)』에 "정조(正朝)가 1년의 첫날이니 면(麵)은 만두를 쓰고, 떡은 떡국에 사용한다."는 말이 기록된 걸로 보아 조선 중기 에는 설날에 떡국과 함께 만둣국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유래를 가지고 최근에는 주로 북한에서는 설날 만둣국을 먹고 남한에서는 떡국을 먹는다.
조선 최고의 예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친구 신의경(申義慶1557-1648)이 지은『초고(草稿)』를 바탕으로 수정·첨삭·보완해 완성한 상례(喪禮)에 관한 실천적 예서인『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만두가 빠지지 않는다. 이는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주자(朱子)의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만두가 등장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