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
해당 판결은 최근 한 언론사에서 '성범죄 판결, 대법원이 제동'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이른바 '성인지 감수성' 판례로 알려진 기존 대법원의 판례를 직접 반박하는 대법원 판례가 선고되었다는 것이다.
기존 판례를 반박했다는 해석은 사실 옳지 못하다. 다만 이 판결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성범죄 사건에서 암암리에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여 피고인에게 무죄의 입증책임을 부담시켜왔던 수사와 재판 관행을 정면으로 지적하며 경종을 울렸다는 것에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1심, 2심 재판의 유죄 선고 이유에 '피고인이 제출한 증거는 무죄를 입증하기에 부족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검사가 유죄의 입증책임을 부담하고 있는데도 실질적으로 피고인에게 입증책임을 전가해 왔음이 버젓이 판결문에 드러났던 것이다.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2018년 선고된 이른바 '성인지 감수성' 판결이 그 단초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해당 판결이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라는 의미로 씌여진 것은 전혀 아니다. 그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판결이며 필요성 또한 분명했다.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쉽게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해 '성범죄 피해자라면 곧바로 신고하였을 것, 성범죄 피해를 당했는데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등의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그에 어긋난 행동을 트집 잡아 신빙성을 판단하던 관행에 제동을 걸었던 중요하고 획기적인 판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수성이라는 문학적 단어의 사용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명확하지 못하다 보니 현장에서는 이를 단순화하기 시작했다.
'피해자 진술은 일관되기만 하면 일단 믿어서 유죄로 보고, 다른 증거가 있으면 무죄로 판단하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싹트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사법 현장의 편리함이다. 이렇게 편한 수사가 있을 수 없다. 피해자 진술로서 증거는 이미 확보했으니 피의자에게 반대되는 증거를 가져와 보라고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경찰은 느긋하게 꼼짝도 않는 반면, 피의자가 CCTV를 구하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지워진 문자메시지를 복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일이 당연한 일처럼 돼버렸다. 게다가 그런 방식의 잘못이 지적되기는커녕 법원에서도 쉽게 유죄가 선고되는데 유죄추정의 원칙이 자리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는 성인지 감수성 판례를 언급하며 "이는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하여야 한다거나 그에 따라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오죽하면 이토록 당연한 내용을 굳이 언급해야 했을까 싶기도 하다.
혹자는 이번 판결을 남녀갈등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여성 대법관이 퇴임하자 발생한 일이라거나, 향후 피해자를 공격하는 도구로 악용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성인지 감수성 판결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하고 그것이 형사법의 근간인 무죄 추정의 원칙을 배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를 명확히 한 것에 가깝다.
피의자에게 무죄의 입증책임을 부담시키는 현재의 공공연한 실태는 사법 현장에는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어서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물론 성인지 감수성 판결 이전 과거로의 회귀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판결은 피해자와 피의자 또는 남녀의 대립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수사기관을 향해서는 그들에게 부여된 증거주의에 입각한 입증책임을, 법원을 향해서는 헌법적 원칙을 준수할 책임을 강조한 것이라는 점을 되새겼으면 한다.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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