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수많은 사람과 만나게 된다. 그저 스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름이나 얼굴 정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조금 더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있다. 놀이나 일을 함께하는 경우, 동고동락같이 보다 긴밀한 관계도 있다. 아무리 가까워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수십 년 살 맞대고 함께 살아도 알지 못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교육이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기도 한다. 만남이다. 사람과의 만남, 자연과의 만남, 자신과의 만남이다. 유한한 시간 속에 무엇인가 만난다. 대상의 종류, 관점에 따라 정보의 질과 깊이가 달라진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알려고 노력하지만, 그 아는 것은 일천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성찰하지 않으면 세상 모두 달관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그에 사로잡혀 건너짚고 함부로 상상한다. 굳건히 성을 쌓고 스스로 갇히기도 한다. 마침내 생각의 노예가 된다. 거기까지는 개인의 자유이다. 그것으로 부족한 것일까? 곡학아세(曲學阿世), 혹세무민(惑世誣民)에 나선다. 바르지 못한 앎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정신을 홀린다. 세속의 인기 영합에만 집중한다. 거짓과 부허로 세상을 덮으려 선전선동에 나선다. 일부 정치인에게 느끼는 소감이다.
대화하고 펼치는 것은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 아닌가? 자유로운 사고의 소통이 방해 받아서야 되겠는가? 팬덤 정치가 자유로운 소통을 가로막고 있음을 본다. 양심의 자유,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우리 모두의 선망 아니랴. 민주주의 발전은 자유를 확장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반드시 사회적, 역사적 책임이 따른다. 정치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해관계의 조정이나 통제도 가능한 모든 사회 구성원의 생각을 최대한 담아내는 것이다. 스스로 왜곡된 사고의 노예가 되거나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한 일 아닌가? 나아가 모든 구성원을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서야 되겠는가?
아는 것이 즐거움이어야 한다. 괴로움, 고통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가능한 대다수의 마음에 들어 흐뭇하고 기뻐야 한다.
인구에 많이 회자되는 말이요, 수차례 인용하기도 하였던 말이다. 다시 한 번 음미해본다. 논어 옹야편에 나온다. "공자가 이르기를,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論語 雍也)"
논어집주의 설명이다. "윤씨(尹焞)가 말하였다. '안다는 것'은 도(道)가 있음을 아는 것이요, '좋아한다는 것'은 좋아하나 아직 얻지 못한 것이요, '즐거워한다는 것'은 얻음이 있어 즐거워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장경부(張?)가 말하였다. "오곡에 비유하면, 아는 자는 그것이 먹을 수 있음을 아는 자이고, 좋아하는 자는 먹고서 좋아하는 자이고, 즐거워하는 자는 좋아하여 배불리 먹은 자이다. 알기만 하고 좋아하지 못하면 이는 앎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요, 좋아하기만 하고 즐거워함에 이르지 못하면 이는 좋아함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니, 이는 옛날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힘써 쉬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소박한 꿈을 짓밟지 말라. 사고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도록 작은 성의를 방해하지 마라. 모르거나 지극하지 못한 앎으로 세상을 왜곡시키려 하지 말라. 세상이 악으로 보이는 것은 앎이 없기 때문이다. 알아야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다. 좋아하지 않으면 어찌 즐거움이 있으랴. 즐기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더불어 즐겁게 한다. 그를 통해 더 큰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아는 것은 머리로 하며, 거기에 쌓인다. 진정으로 좋아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것은 마음이다. 즐기고 더불어 누리는 것은 실천에서 온다. 제대로 알아야 공감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곧 머리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다리로 옮겨가는 것이다. 거기에 최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가깝지만 멀기만 하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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