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구환 한남대 링크3.0사업단장 및 캠퍼스혁신파크선도사업단장 |
적당한 거리와 관련된 우화가 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다. 고슴도치는 무리를 이루지 않고 홀로 다니는 외로운 동물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늘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체온을 나누고자 모여드는데, 서로의 가시가 문제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모여들지만,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는다. 상처는 서로를 멀어지게 하지만, 추위를 이기는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모이고,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고슴도치들이 시행착오 끝에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찔리지 않을 만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다.
식물과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인간(人間)의 한자를 보면 사람인(人)과 사이 간(間)으로 이뤄져 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혼자 살아가기는 힘들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성을 지닌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회관계 속에서 사람 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를 맺음에 있어 난로처럼 대하라는 말도 있다. 난로에 가까이 가면 자칫 화상을 입을 수도 있고, 멀리 떨어지면 추운 법처럼 말이다. 인간관계도 너무 가까우면 상처주기 쉽고, 너무 멀면 외로워지는 법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가족들과 영화를 한 편 봤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영화였다. 우리 자녀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옛날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아픔을 되새기게 만든 영화였다. 그동안 뜸했던 우리 아이들과 대화 시간을 가졌고, 멀리 떨어졌다고 느꼈던 역사를 가깝게 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까. 군사 반란에 성공한 이후 군부독재 세력은 자신들만의 편향된 목적을 위해 비민주적 일들을 감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언론탄압이었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통폐합, 언론인에 대한 감시와 해직 등으로 언론 길들이기를 한 것은 기본이었다. 언론을 통제해 권력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했고, 국민의 알 권리는 뒷전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말처럼 다시는 악이 승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비판적 사회 책무가 필요하다. 언론의 역할을 권력이 대신할 수는 없다. 권력이 언론의 감시를 받지 않으면 악이 되살아난다. 건설적이고 공정한 비판 언론은 권력의 적이 아니다. 비판 언론을 공정 언론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옥죄는 일은 다시 악이 승리하는 길이 될 뿐이다.
권력에 의한 언론의 통제도 문제지만, 권력과 언론의 지나친 밀착도 문제다. 공정한 언론으로 건설적인 비판 의식을 천직으로 여기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책무를 다한 언론인들이 있었음도 인정하지만, 권력과 언론의 밀착 현상으로 우리 사회의 현상을 왜곡했던 사례가 있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진정한 저널리스트(journalist)가 아닌 폴리널리스트(polinalist)의 존재는 권력과 언론의 적당한 거리 유지를 어렵게 한다. 권력과의 밀착성이 언론의 본질이 아니다. 언론이 권력에 가까워지면 권력의 시녀가 되고, 멀어지면 권력을 비판 감시하기 어렵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 준수는 그래서 중요하다.
원구환 한남대 링크3.0사업단장 및 캠퍼스혁신파크선도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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