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용 교수 |
산업사회를 거쳐 디지털혁신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존엄성과 삶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소외되고 희생되는 취약계층의 심화는 뚜렷해졌다. 나를 지켜주는 국가, 신뢰하는 사회를 위해 포용정책(Inclusive Growth)적 노력과 참여가 매우 필요한 시기이다. 사회적 다양성의 이면에는 사회적 갈등의 잠재력이 높아지는 만큼 사회갈등 완화와 해소를 위해서는 어렵겠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최우선인 것 같다.
이완배 기자는 협동의 경제학, 경제의 속살 등에서 "협동이"와 "얍실이"의 비유로 사회구성원간의 이해관계와 상호작용을 설명하였다. 협동이와 얍실이의 정의는 이렇다. 협동이는 개인과 공동의 목적을 이해하고 공정한 과정을 통해 협업하고, 새로운 상황에 긍정적으로 판단하며 빠르게 적응한다. 얍실이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기만하거나 교활한 수단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 얍실이는 협동이가 없으면 존재하기 어렵다.
얍실이는 경제적, 사회적 무임승차자로 표현되는데 공동의 목표와 가치에 대하여 투자와 노력하지 않고 협동이들의 노력에 올라타 공익재원을 챙기는 존재들이다. 제도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배려와 보호가 필요한 취약계층의 몫까지 챙겨 배를 불리는 혜택을 누린다.
문제는 우리사회 생태계의 건강성이다. 건전한 시민지성과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포용성 그리고 단호한 질서와 자정능력이다. 포용사회의 정책을 실현함에 있어 선거철의 공약에 따라 죄우되는 선언적 홍보와 포퓰리즘이 아닌 공익적 실효성과 도덕적 공감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포용사회는 교육의 균등한 기회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교육이 개인의 역량을 개발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로서 양성되도록 하지 못하고 사회의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지는 것도 현실이다. 교육을 받는 시기부터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거나 준법과 신의, 성실에도 불구하고 불이익을 경험을 하게 되면 신뢰를 회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누가 협동이이고 누가 얍실이인가? 유토파아가 아닌 이상 협동이와 얍실이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느 비율로 존재하는 것이 적정한 수준일까?
갑자기 필자는 스스로에게 궁금해졌다. 나는 협동이일까? 당연히 나는 그런 사람이겠지? 의 생각에서 바로 쉽게 바뀌어졌다. 많은 부분에서 얍실이의 역량도 상당히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나부터 챙겨야겠고, 특히 누구의 덕인지도 모르고 누리는 혜택이 당연하다는 기득권이고, 쉽게 나쁜 거라고 규정하고 단절하는 꼰대의 기질도 강하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다시 생각해보자! 그래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므로 협동이와 얍실이의 양면을 다 가지고 있겠지? 라고 합리화가 되었다. 비겁하지만 소인배로서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협동의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도록 공정한 신뢰 기반의 사회, 경제적 질서와 보편타당한 가치 기준이 굳건해야 한다. 얍실이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노력과 결과적으로 얍실이는 손해가 되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리더의 도덕적 역량과 시민의식의 자정작용으로 사회적 신뢰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김규용 충남대 스마트시티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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