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떠도는 말은 눈덩이처럼 부풀려지거나 변모된다. 녹아서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문자는 그 진의가 분분해진다. 조작도 있다. 영상도 다르지 않다. 거기에 문학적 메타포(metaphor)까지 더해지면 진위여부 판단이 더욱 어렵다. 참 어려운 것이 소통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시작부터 교묘하고 현란한 말이 난무하며, 인신공격, 인격모독도 서슴지 않는다. 상식이하인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왜곡, 편견, 허위, 아첨으로 점철되어 있기도 하다. 공인이라 할 만한 사람 언사가 그러한데, 지나쳐서 일까, 일반인은 무덤덤해 보인다. 평범한 사람 무시하는 작태 아니겠는가? 우습게 보는 것이다. 누구 탓이랴? 우리 모두, 나아가 사회적 책임이다.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
늘 아름다운 이야기 전하는 것이 소망이다. 또한 공자왈, 맹자왈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또다시 들먹이게 된다. 필부이기 때문에 빌려 사용하는 것임을 양지해주시기 바란다. 일종의 호가호위다.
그럴싸한 말로 속이거나 남의 비위 잘 맞추는 사람에게 당하지 말자. 《논어》에 나오는 몇 가지 공자말씀을 들춰본다. <학이>와 <양화>에 거듭 나온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는 사람 가운데 어진 이가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 교묘한 말을 잘하거나 꾸미는 얼굴은 사악하다. 진실하지 못한 공인은 5천만, 나아가 인류를 속이는 것이다.
<공야장>에 이른다. "말을 잘 꾸미고 얼굴빛을 좋게 하며 지나치게 공손 떠는 것을 옛날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좌구명'은 공자에게 춘추를 배운 사람이다. 공자의 제자 말이 제각각이어서 공자의 참뜻이 사라질까 우려하여 《춘추좌씨전》 30권을 집필한 사람이라 전한다. 놀라운 것은 공자가 제자에게 배울 점이 있다 들추는 것이다. 교언영색뿐만 아니라 지나친 공손도 부끄럽게 여겼다. 그 또한 예가 아닌 것(過恭非禮)이라 여긴다. 요즘 공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스스로 사이다 발언이라 하지 않는가? 더하여 유유상종 아니랄까봐, 끼리끼리 친분이 두텁다 으스댄다. 떼 지어 다니며 이웃을 농락한다.
<위령공>편에는 이렇게 말한다. "꾸민 말은 덕을 어지럽히고,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책을 어지럽게 한다.(巧言亂德, 小不忍則亂大謀.)" 감언이설(甘言利說)은 개인과 사회가 파탄에 이르게 한다. 세상에 믿을게 없다고 생각해 보라. 엄청난 사회악 아닌가? 그렇다고 감정조절이 안 되면 큰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 보다 이성적 대처로 물리쳐야 하는 것이 교언영색인 것이다.
예전에 KBS 사장이었던 서영훈 선생으로부터 받은 붓통이 있다. 지금도 책상위에 놓고 사용하는데, 거기에 '광파공론(廣播公論)'이라 씌어 있다. 공론은 함께 논의하거나 논의된 내용이다. 사회 일반의 공통된 의견이나 공정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식적인 올바른 공론을 널리 퍼트린다는 말일 게다. 그것이 언론의 올바른 책임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있지 않을까? 때때로 왜곡되고 사악한 말, 거짓으로 덮여있음에 놀란다. 그 생산자 및 내용은 전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소비자가 자극적인 말에만 관심이 있다고 보는 것일까? 그것이 언론 소비자를 세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 선별해서 보도하는 것은 어떨까? 너나없이 추구하는 하나가 '공동선' 아닌가? 언론에게 선도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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