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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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아버지

민순혜/수필가

  • 승인 2024-01-10 10:11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나는 흰 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다. 특히 생일이 있는 1월을 좋아했다. 생일날 친구들과 새하얗게 눈 덮인 계룡산 삼불봉 정상에 올라 목청껏 야호를 외치던 기억들은 지금도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그러나 온기는 잠시, 언젠가부터 불기 없는 방안에 냉기만 가득 차오듯 몸을 움츠리게 한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기일이 12월이다. 흰 눈 쌓인 산등성이에 아버지를 모신 이후, 겨울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겨울은 냉혹하리만큼 춥다.

나는 아버지 생전에 애틋한 딸이 아니었다. 3남 3녀인 우리 6남매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아버지는 매사에 조금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특히 성적에 있어서는 아주 단호하셨다. 오빠가 전교 2등을 했을 때도 칭찬은커녕 다음에는 1등을 해보라고 하실 정도였다.

귀가도 어둡기 전에 해야 했다. 남자들도 외박은 절대 불가였으니 아마 말은 하지 않아도 불만은 있었을 것이다. 귀가 시간은 어머니한테도 적용되어서 어머니도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다. 숨통이 트였던 것은 아버지가 낚시를 좋아하셔서 주말마다 1박 2일로 낚시를 가셨는데, 그때가 우리한테는 유일하게 자유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불호령 속에서도 각자 캠퍼스 커플로 만나서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서 형제자매들은 비교적 일찍 결혼했다. 나만 남아 본의 아니게 부모님과 3식구가 살게 되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서 그즈음 본 분들은 내가 무남독녀 외동딸인 줄 아는 분도 많았다. 사실 나는 겁이 많아서 아버지 말씀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산을 좋아해서 주말이면 대전에서 가까운 계룡산으로 산행을 갔다. 하루는 아버지가 휴일에 계룡산에 갔다 오시더니 산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는 숲속에서 텐트치고 야영할 수 있을 때였는데, 아버지가 숲속 오솔길을 올라가시는데 드문드문 숲속 텐트에서 젊은 남녀가 나오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니 "너야 그렇지 않지만, 남들이 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금지령을 내리셨다. 거의 1년 정도 안 갔던 것 같다. 내가 불쌍해 보였던지, 노는 날 집에만 있지 말고 산에도 가라며 등산용품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을 주셨다. 그 후는 더 말씀을 안 하셨다.

그러나 밤늦게 귀가는 여전히 불가. 퇴근 후 친구들과 저녁 외식 후 차 한잔도 못한 채 허겁지겁 집에 와야 했다. 대문 초인종을 누르면 소리가 어찌나 큰지 환할 때인데도 가슴이 두근두근했었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시면서도 안에 계신 아버지를 의식해서인지 퇴근하면 일찍 오지 않고 왜 이렇게 늦느냐고 한 말씀 하시곤 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나는 점점 '집순이'가 되어갔음은 물론이다. 친구들이 나를 '집순이'라고 불렀다. 친구들은 그즈음 결혼식을 많이 할 때였다.

그런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가니 아버지가 부르셨다. 대문 열쇠를 건네주셨다. 퇴근 후 집에만 있지 말고 친구들과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라고 하시는데 불현듯 나를 쫓아내려고 그러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아버지 친구분이 집에 오셔서 나를 보더니 아버지한테 다 큰 애를 왜 데리고 사느냐며 내보내라는 말을 들어서였다.

이튿날 어머니한테 물었더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아버지한테 내가 말했다. 네가 맨날 집에만 있어서 다른 애들처럼 연애도 못 하니까 시집을 못 간다고, 대문 열쇠 하나 복제해 주자고 했다."

그러나 기쁘지 않았다. 그땐 이미 친한 친구들 대부분 결혼해서 늦게 귀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완고하신 아버지한테 은연중에 반항심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반항심으로 오히려 아버지 말씀을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버지와 같이 식사하면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밥알을 흘린 것 같아서 괜스레 두리번거려졌다. 그러니 식사 때는 갖은 이유를 붙여서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신 후에 식사했다. 아버지에 대한 이런 불편함은 어머니도 어느 면에서는 있으셨던 것 같다. "너는 네 아버지 딱 닮았다"라며 별일 아닌 일에도 짜증을 내시곤 했다.

그야 물론 친 딸이라면 어디를 닮아도 닮았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것 같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주량은 아버지 닮았다. 다만 아버지는 주사가 있으시지만, 나는 만땅 취해도 조용하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골목 어귀부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시거나 해서 동네가 시끄러웠다.

자식들도 아버지 닮은 쪽은 술을 잘 마시고, 어머니 닮은 쪽은 술을 전혀 못 마셨다. 식성도 나는 아버지를 닮아서 생선회를 좋아하지만, 어머니와 어머니를 닮은 형제는 생선회를 전혀 못 먹었다. 부모님을 닮는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그러나 주사는 정말 싫었다. 내 상대 남자는 일단 술을 마신다면 만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도 아버지 시선을 피했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부르셨다. 또 무슨 일인가 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방을 들여다봤더니 아버지가 신문을 펴 들고 계셨다. "아버지, 부르셨어요?"라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빙긋이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얘야, 여기 이 글, 네가 쓴 거 맞냐?" 그 며칠 전 대전의 일간신문 독자란에 기고한 '서점에 가면' 에세이였다. 그 당시 아버지의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글이라고는 내 생애 처음 써본 글이었다. 무슨 연유로 독자란에 기고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읽어도 정겹다.

'나에게 있어서 서점은 보물섬과도 같다. 섬처럼 먼 곳에 있는듯 하다가도 그곳에 가기만 하면 보석처럼 반짝이는 책들이 무진장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즐겨 서점에 간다. 혹시라도 우연히 들렀던 서점에서 진귀한 것이라도 발견할까 싶어서다. 간혹 서점에 따라서는 책 이외에도 교육용 비디오테이프, 카세트테이프 등이 진열돼 있어서 사 오기도 한다._중략' -대전의 일간신문 독자란에 기고한 <서점에 가면> 1994.4.14.(목) 발췌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셨는데 나는 그것뿐, 더 쓰지는 않았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버지가 작고하신 후였다. 내가 글을 발표할 때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올해는 글을 좀 더 열심히 써서 출간하게 되면 아버지 영전에 바치고 싶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시던, 못난 딸내미가 쓴 글을 모은 책이라고 말씀드리면서 영전에 바치고 싶다.

민순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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