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하나밖에 없는 어린 딸아이에게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시도 때도 없이 주문을 건다. '값어치 없는 삶'은 이 세계에 쓸모가 없는, 폐기되어야만 하는 삶이 되어버리기에 십상이다. 내 앞의 연극의 무대도 그렇게 품평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 연극의 세계가 어떠한 '값어치'가 있는가를 따지면서, 지난 12월 마지막 본 작품이 극단 손수의 <검은 얼룩>(신성우 작, 윤민훈 연출)이었다. 내리 물림되는 '원죄의식'에 대한 망상과 '악'에 대한 인물 내면 심리를 확장해볼 수 있는 잘 짜인 각본이면서도, 극 중 지워지지 않는 '얼룩'의 상징이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그러면서 그 '값어치'의 양가성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G.프로이트가 쓴 『토템과 타부』에서는 타부의 금지된 행위가 무의식 안에서 이를 강하게 수행하려는 경향이 존재하는데, 이를 금기와 욕망이라는 타부의 양가감정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영화 <기생충> 등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의 삶에 대한 가치판단에서 정작 그는 온데간데없이 문제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 세계와 이에 각인된 타인의 시선과 그 감정만이 남아 내게 들려오는 소문이 여간 불쾌할 수 없다. 제 한 치 앞 삶도 잘 모르면서 타인의 삶에 대한 값어치를 속단하는 것이야말로, 그 '검은 얼룩'이 아닐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치판단의 상반성과 그 공존을 깊이 새겨보면, 자신의 금기와 욕망의 감정을 주체적으로 돌아보지 못한 채, 멋대로 타인의 삶의 값어치를 매긴다. 어쩌면 그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가치를 매기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새해 첫날, 책상 앞에 앉아 한 선배가 정성스럽게 골라 보내준 시 한 편을 옮긴다. 수만 편의 시 가운데, 천양희 시인의 <시작과 끝>을 읊조리면서 "저 서산 저 저녁강/참 냉랭하지요./가는 해 가는 날이/또 얼마나 얼룩얼룩합니까."라는 끄트머리 구절에 내 얼룩덜룩한 어제를 돌아보면서, 그렇게 오늘부터는 어떻게 생생하게 살아야 할지, 청청한 새해를 맞이하는 맘가짐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연극 <홍상수 영화처럼>(이정수 작, 연출)의 리뷰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말미에 희곡 대사를 삽입한다. 연극에서 이야기하는 예술의 리얼리티, 예술의 경계에 대한 물음에 대한 대답이 쉽지가 않다. 예술적 대상의 해석에 대한 '주체성'을 다시금 곱씹지 않을 수 없다는 말도 적어 넣었다. 극 중 '한진구'의 그 대사 한 토막, "우리는 그저 더 많이 알기를 바라고, 더 아는 척하려 하는 것뿐."이라고 써놓고 보니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뜨끔하다. 내가 이 세계에 값어치 있는 척 생색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글 한 편이 그 연극이든, 이 극장 밖 세계든 작은 생기 하나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만으로 만족할 만하다 위안도 삼아보고자 한다. 값어치 있는 삶의 인정을 누군가에게 바라지 않고, 먼저 오늘의 내 얼굴을 마주해봐야 하지 않을까. 연극을 보러 나서면서, 제 손에 따듯한 김을 호호 불어본다. 어느 시집 한 구절,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서... 비풍초똥팔삼'(*김병호, <왼손을 위한 주문> 인용)을 쥐고 나는 가질 게 아니라 버려야 할 것의 순서를 정해본다. 갑진년, 무엇을 버리며 바람을 짜낼 것인가. 조훈성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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