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귀뒤미디에서 바라본 동쪽 전경. 산악인들이 왼쪽 에귀베르트(Aiguille Verte 4122m)에서 에귀뒤미디로 귀환하고 있다. 가운데 탈레프르 빙하가 보인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220여 년 만에 환생한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가 케이블카를 타고 에귀뒤미디 전망대에 오르는 요즘 풍속도를 목격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에귀뒤미디에서 내려와 소쉬르, 발마, 파카르의 열정과 탐욕, 거기서 탄생한 알피니즘의 히스토리를 성글게 엮으면서 시내버스를 타고 르투르 산장으로 귀환해 이튿날 트레킹에 대비했다.
마지막 날은 르투르를 출발해 11㎞를 걸어 다시 샤모니몽블랑으로 입성하는 일정이다. 몽트록을 거쳐 세스리 호수와 에귀에트 다르장티에르(1893m) 서쪽 루트 끄트머리 플레제르 산장 인근이 최종 목적지다. 거기서 곤돌라를 타고 샤모니몽블랑에 안착하면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여름철 샤모니몽블랑의 첫인상은 싱그러움이다. 설산과 빙하가 도시 외곽을 성벽처럼 둘러막고 하늘에는 해발 3000m 이상 고봉에서 연달아 날아오르는 패러글라이딩 쇼가 펼쳐진다. 지상에선 케이블카가 에귀뒤미디와 브레방 방향으로 분주히 외줄타기를 한다. 케이블카와 산악열차, 시내버스 정류장마다 배낭을 짊어진 트레커들로 넘쳐난다.
샤모니 몽블랑 발마광장에서 바라본 몽블랑(가운데 하얀 산)과 에귀뒤미디(왼쪽) 꼭대기에 어렴풋이 전망대가 보인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소쉬르는 '등산'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인물이다. 그 이전에는 몽블랑을 비롯해 에귀뒤미디 등 설산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무서운 산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빙하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지면서 아랫마을을 덮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몽블랑에 간다고 하면 정신병자거나 악마의 저주를 받는다고 말렸다.
식물학자, 물리학자, 기상학자였던 소쉬르는 식물채집을 위해 샤모니의 브레방(2526m)에 올랐다가 주변 설산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가장 높은 이름 없는 산에 '몽블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사람도 그였다. 소쉬르는 몽블랑에 오르기 위해 노력했지만 스스로 한계에 부딪혀 포기했다. 대신 '몽블랑에 오르는 사람에게 큰 상금을 주겠노라' 공언했다. 그로부터 26년 후 상금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자크 발마(1762-1834)와 미셸 파카르(1757-1827)였다.
발마, 소쉬르 동상과 동떨어져 나중에 건립된 닥터 파카르 동상.(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샤모니 마을은 물론 프랑스 전역이 몽블랑 등정 소식에 발칵 뒤집혔지만,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발마의 거짓 인터뷰에 따라 몽블랑 정상등극은 발마 혼자였고 파카르는 정상 코앞에서 포기한 것으로 인식됐다. 첫 번째 기념 동상은 그런 연유로 발마와 소쉬르 두 사람만 기렸다. 그로부터 100년 뒤 소쉬르 증손자가 보관하고 있던 사료에서 파카르도 등정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동상도 세워졌다. 아마도 의사라는 파카르의 상류층 신분이 시기와 질투로 이어지고 광부라는 발마의 직업에 측은지심과 군중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발마의 최후는 금을 채굴하다 추락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후세는 진실을 바로 잡는 의미로 샤모니몽블랑 중심가에 파카르의 동상과 함께 '닥터 파카르거리'를 지정했다.
발마와 파카르의 몽블랑 등정 이후 알프스 이름을 딴 '알피니즘'이 널리 퍼지고 이후 200년 동안 전세계 고봉을 향한 등정 경쟁이 활활 타올랐다. 지금은 거의 모든 산이 인류에 의해 정복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알피티즘 본산 샤모니몽블랑은 당연히 1924년 제1회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우리나라는 '등산'이 '산에 간다'는 의미로 포괄적이지만 외국에선 '클라이밍', '트레킹', '하이킹', '알피니즘', '마운티니어링' 등 세부적으로 개념을 세우고 산행을 즐긴다. 산에서 정직함을 배우려는 현세의 현장학습법이다./김형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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