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발견된 방공호 성격의 동굴과 지하시설 입구 모습. 동구 신상동과 중구 호동의 동굴 입구와 중구 목동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 지하공간 입구 모습. 전쟁 중 방공호와 핍박의 유산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
[보문산 파고든 동굴, 누가 왜?]
5. 잊으면 반복되는데 우리는…
대전역에서 KTX를 탑승해 부산역에 닿기 직전에 정차하는 부전역 일대(54만3360㎥)는 1910년 일본이 강점했던 곳으로 광복 후 미군의 군영지로 사용돼 2010년이 되어서야 부산에 반환된 땅이다. 100여 년간 이방인이 점유했던 땅을 되찾은 부산시는 이곳을 부산시민공원으로 조성하고 역사관을 건립했다. 이때 첫 학술연구 주제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일본군의 부산배치 상황을 지금의 일본 방위성 자료를 조사해 밝힌 것이다. 그 결과 1940년 조선군 임시병참사령부가 부산에 진주할 때 남긴 기록을 수집하고 조선출신 고용인 연명부와 일본군 고사포 제51연대장 회고록, 일본군영지 공사설계서를 입수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연구총서를 발행, 부산 근·현대사의 공백기를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호남선을 경유해 서대전역으로 돌아와, 이 일대가 미군 부대가 있기 전에 일본군이 주둔했던 군영지로 쓰일 때 역사는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다. 경부선 대전역이 개통하기 전부터 대전은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했으며, 1911년 호남선 이용하기 편리한 지금의 서대전시민공원 일대(66만㎥)에 부대를 펼치고 1937년부터 1945년까지 경성 이남 지역에 대구를 제외하고 최상급 일본군 부대가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태평양전쟁 말기의 1944~1945년 일제가 대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군사시설에 대해서는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보문산 일원에서 최근 잇달아 발견된 인공 동굴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에 대비한 시설일 가능성이 짙은 상황이다. 일본군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약고까지 발견됐고, 보문산 일원에서 석탄과 금, 은 등의 자원개발은 그동안 보고되거나 주민들에 의해 목격된 바 없기 때문이다. 중도일보가 최근까지 확인한 보문산 일원 동굴 5곳을 굴착했을 당시 많은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고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마땅한 목격자나 굴착에 참여한 시민이나 후손이 확인되지 않았다. 1943년 학도병이나 징병제에 의해 강제 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 예하 부대에 배속되어 하루 3교대 굴착했고 광복 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지 추정될 뿐이다. 동구 식장산의 방공호와 정상에 고사총 진지로 보이는 시설물 역시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파악하지 않았다.
조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제강점기 방공호와 전쟁유물은 한반도와 식민지 조선은 일본군의 본토결전의 볼모로 사로잡은 채 희생을 강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증거"라며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한반도 결전 시 지하 총사령부를 옮길 장소로 대전을 적지로 판단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어 보문산 이번 동굴발견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연구될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관람시설로 사용 중인 보문산 아쿠아리움의 옛 충무시설 방공호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조성되었는지조차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채 구전과 추정으로만 짐작하는 실정으로 이번 기회에 대전지역 태평양전쟁 유적 전수조사가 요구된다. 또 중도일보가 확인한 인공동굴 중 일부는 주민들도 모르는 사이 무너졌고 지금도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아 붕괴 등의 시민 안전을 확보하는 조치도 필요한 실정이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일본군 육군조병창이 있던 인천시 부평에서 처음에는 5~6개의 동굴이 발견되었으나 이를 바탕으로 정밀조사에서 30여 개까지 늘었고, 반전평화의 교육장으로 쓰인다"라며 "일본 방위성의 공개자료를 조사하면 보문산 동굴에 대한 기록과 도면, 강제동원 인원 등의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일본의 것이 아니라 대전이 강점을 극복한 역사 찾기라는 시선으로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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