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버그가 아닌 어른으로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버그가 아닌 어른으로

김태열 수필가

  • 승인 2023-12-18 11:08
  • 신문게재 2023-12-19 19면
  • 이유나 기자이유나 기자
김
김태열 수필가
올해부터 달마다 꼬박꼬박 들어오던 밥줄이 삭아 끊어졌다. 어디에도 메이지 않고 자유로울 듯했다. 하지만 점점 속에서 뭔가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거대한 한 마리 벌레로 변해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샐러리맨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는 미혼의 가장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 벌레로 변했고 헌신했던 가족한테 버림을 받으면서 죽어간다.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요양원으로 떠밀려 가는 현 세태와 겹쳐졌다.

버그(bug)를 사전에서 찾으면 벌레,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에서 난 오류를 뜻한다. 오래전 학교에서 처음 컴퓨터를 접했다. 프로그램을 짜면 중앙컴퓨터에서 천공한 카드와 결과를 받았다. 신기했다. 직장에서는 PC의 시대였다. 90년대만 해도 포트란으로 작성된 프로그램의 실행파일을 돌리다가 에러가 나면 소스 파일을 분석해서 버그를 찾아 제거했다. 사무실에서 업무로 쓰는 프로그램일지라도 대개 학습용이거나 데모 버전이라 가능했다.

디지털 정보화의 거센 물결이 일상을 휩쓸고 있다. 한두 해 전만 해도 음식점 같은 곳에 설치되던 '키오스크'가 커피숍 고속도로 휴게소 등 사방에 쫙 깔렸다. 제품마다 사양이 다르고, 숙달되지 않아 버벅거리면 어느새 시간 지체가 생긴다. 직원은 손님 대접이 아닌 버그를 잡아내듯 '이리 오세요' 한다. 내 돈 내고도 맘 편히 못 사 먹는 세상이다.

일 처리 방식도 코로나 사태를 기점으로 바뀌고 있다. 영화 철도 버스 승차권 항공권 예매가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바뀌고 있으며 유인 점포가 줄어들고 있다. 디지털 정서와 적응력을 수치화한 디지털 지수(digital quotient)가 낮고 대면 방식에 익숙한 노인 세대들은 점점 디지털 난민으로 내몰리고 있다. 게다가 챗-GPT까지 등장하여 세상을 흔드니 막막할 뿐이다.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따라가자니 눈도 침침하고 기억력도 흐릿하여 어렵다. 힘들다고 그 시절을 그리워할 수도 없다. 우리는 어쩌면 정보화에 기대어 얻는 편리와 효율을 얻는 대가로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알고리즘에 빼앗기고 있는지 모른다. 한편에서는 이런 흐름에서 소외되거나 늦은 이들을 위한 대책도 갖추어야 한다는 소리도 흘러나오고는 있다,

한국은 생산가능인구를 벗어난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내년 천만 명을 넘을 전망이다. 65세가 되면 복지혜택이 많다. 지하철 국립미술관·박물관 등이 공짜고 버스·열차·여객 요금, 공연료와 관람료가 할인된다. 지금 받는 복지혜택이나 노령연금은 미래세대의 부담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는데 저출산의 여파로 세대 간의 갈등이 두드러질 개연성이 아주 높다. 그런 점에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 사회의 문제를 다룬 영화 '플랜75'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75세 이상 노인들을 연금 벌레로 간주하여 안락사하는 일에 정부가 나서고 있다. 공상 속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라도 시사하는 바는 크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세대 간 이익을 다투지 않고 각각의 역할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 지금 노인인구에 진입하는 베이비붐 세대는 속도에 뒤처질지는 몰라도 경험을 기반으로 남다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젊은 노인(Young Old)이다. 그들이 사회의 버그로 전락하지 않도록 배움의 문을 열어놓는 한편, 배달 청소 돌봄 안전 조사 농업 등 분야에서 일자리의 기회를 공유하면 좋을 것이다.

평생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돈을 의로운 일과 장학사업에 쏟은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를 TV로 보았다. 부와 권력 명예에 함몰되지 않은 자유의 정신으로 어른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감명 깊었다. 앞선 세대는 뒷선 세대들이 힘차게 이어갈 수 있도록 적어도 짐은 되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 자기만의 가치로 적은 힘이라도 보태는 것이 버그가 아닌 어른으로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일 테다.

김태열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