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동구 신상동에 있는 동굴 벽면에 곡괭이로 굴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세천동 주민들이 강제동원돼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
4. 수탈과 참상의 전쟁유적
대전 동구 신상동 동굴은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이역만리 조선에 미친 영향을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옛 세천저유소 인근에 위치한 이곳 동굴은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동굴 벽면에 남은 곡괭이질 흔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 번, 두 번, 백 번, 천 번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벽면을 할퀸 곡괭이질 흔적이 손이 닿기 어려운 천장까지 덮고 있다. 곡괭이가 바위에 부딪혀 한 줌의 흙을 토해내기를 얼마나 반복해야 동굴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곳 신상동 동굴은 Y자 형태의 두 방향으로 갈라져 최대 20m 깊이에 폭 3~4m 규모로 일제강점기 세천 주민들이 동원돼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동굴 앞에 대청호가 들어찼지만, 댐이 조성돼 호수가 만들어지기 전 세천마을에서 산 중턱까지 올라온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상동 동굴을 2006년께 탐사한 (사)대전문화유산울림은 이곳이 일제강점기 주민들이 동원됐음을 규명했다. 동굴 인근에 거주한 주민이 일제 강점기 말에 주재소의 지시를 받아 동굴 조성작업에 동원되어 수행한 작업을 구체적으로 증언했기 때문이다. 올해 취재에서는 신상동 동굴 조성에 직접 참여한 이를 찾을 수 없었다.
대전 동구 식장산에 있는 방공호. 일제강점기 탄약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임병안 기자) |
대전 중구 목동에 위치한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건립된 대전 최초의 성당으로 캐나다 출신의 제7대 베드로 주임신부가 일제의 핍박을 받아 장기간 연금생활을 마친 1946년 1월 이곳 수도원에서 순교한 역사가 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적국인 캐나다 신부라는 이유로 같은 해 베드로 신부를 전쟁 포로 신분으로 수도원 도서실에 감금하고 다음 해부터 해방때까지 공주로 보내 연금생활을 강요했다.
베드로 신부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어 성당 신부로 재부임했으나 3년 9개월의 연금생활의 악화된 건강상태에서 천연두를 겪어 1946년 목동 수도원에서 순교했다. 6·25전쟁 때는 수도원이 공산당 충남도 정치보위부 및 수용소로 사용되면서 사제들이 총살된 순교의 현장이면서 신자와 민간인 등 수백 명이 학살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정치보위부가 수감자들에게 노역을 시켜 수도원 지하실과 연결된 방공호를 만들었는데 지금 성당에도 예배공간으로 직접 연결되는 터널 구조물이 남아 있다. 수도원은 재건축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으나 성당은 건립 당시 모습을 간직하는 중으로 예배당 밑에 여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지하실도 존재해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는 연구가 요구된다.
구 신상동에 있는 동굴 벽면에 곡괭이로 굴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세천동 주민들이 강제동원돼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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