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오후를 하릴없이 헤맸다. 어느새 먹색의 하늘엔 흰 달빛이 음습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길을 꺾어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여기는 아직도 내 청춘의 한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골목은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다만 인적이 드문 적막감만이. 친구와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수락은 자취를 감췄다. 새콤매콤한 쫄면을 생각하자 침이 고였다. 아! 광천식당. 대전의 명물 두부두루치기의 원조 아닌가. 대학 다닐 때 여기서 과 모임도 했었는데. 두툼한 두부가 쟁반만한 접시에 가득 담겨 나오는 집. 두부가 꽤 매워 여자동기는 위염이 있다면서 두부를 물에 헹궈 먹었지. 식당 안에서 손님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어두운 골목에 서서 코를 훌쩍였다.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이 난 게 아니었다. 칼바람에 코끝이 찡해서였다.
대림관광호텔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여긴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는 곳이다. 어느날 길을 걷는데 낯선 남자가 차 한잔 하자고 했다. 차려입은 폼을 보니 영락없는 제비족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리는 대림호텔 로비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오렌지주스를 시키고 탐색을 시작했다.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줌이 마려웠으나 주스에 수면제를 탈까봐 꾹 참았다. 덥석 따라온다 싶었는데 빤히 쳐다보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아무래도 잘못 짚었다는 생각을 했는지, 운도 지지리도 없는 제비족은 허탈한 표정으로 찻값을 계산했다. 그 백바지 신사는 안녕하실까.
나는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찻집의 불빛이 이교도의 눈처럼 은밀하게 반짝였다. 자그마한 식당 출입문에 붙은 '오늘의 메뉴 제육볶음, 북엇국, 계란말이'를 보고 문을 열었다. 중년의 사내가 등을 돌리고 밥을 먹고 있었다. 말수가 없고 차분한 표정의 주인 아주머니가 열심히 손을 놀렸다.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은 경쾌하게 음식을 날랐다. 모녀지간이라고 했다. 밥상이 정갈하고 소박했다. 북엇국을 한 술 떠먹었다. 구수하고 칼칼한 게 언 몸이 확 풀렸다. 점심에 찹쌀떡과 곶감을 먹은 탓에 매콤한 것이 끌렸는데 마침맞았다. 오랜만에 먹는 제육볶음에 계속 손이 갔다. 된장으로 무친 쌉쌀한 머위와 무생채는 또 달래서 먹었다. 전기난로의 빨간 불빛이 아궁이 같았다. 쪼맨할 때 불을 때는 엄마 옆에 찰싹 붙어 활활 타는 불을 쬐며 졸던 추억. 누렁이도 내 옆에서 꾸벅꾸벅. 밥은 모성이라고 했던가. 시인 이성복은 '오 밥이여, 어머니 젊으실 적 얼굴이여!'라고 썼다.
골목은 아련한 추억이 밴 원초적인 무언가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흘러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장소. 쓸쓸함과 진한 사람 냄새로 얼룩진 내 영혼의 안식처. 개발논리에 허물어지는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에 대한 애착은 나의 이기심일까.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별이 구름에 숨었다 나타난다. 별이 얼음조각처럼 차가울 것 같다. 골목 입구에 트럭을 세워놓고 귤을 파는 남자가 손을 비비며 서성거린다. 귤 한 봉지를 사서 '이층에서 본 거리'를 흥얼거리며 타박타박 집으로 향했다. <지방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