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충남대 교수 |
엑스포는 주제에 구애가 없는 등록 박람회, 특정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인정 박람회, 그리고 원예박람회로 구분된다. 개최국의 국력 과시가 주목적인 등록 박람회는 1970년 오사카 엑스포 이후로 0, 5로 끝나는 해에만 개최되고 최대 6개월 열릴 수 있고, 전시 규모는 제한이 없다. 금번 유치 경쟁을 벌였던 것이 이 등록 박람회였던 것이다. 이 등록 박람회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인정 박람회이고 등록 박람회 열리는 사이에 1회만, 최대 3개월까지만 개최되고 규모는 25만㎡로 제한된다. 특정분야의 주제로 각국의 전시관은 개최국이 무상으로 제공한다. 우리 나라에서 열렸던 2번의 엑스포는 이 인정 박람회로, 1993대전 엑스포는 이런 규정이 제정되기 전이라 50만㎡ 규모였고, 2012여수 엑스포는 이 규정을 지켰다. 18~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는 동안, 유럽에서는 다양한 신기술을 이용한 비즈니스를 모색하는 산업박람회가 활발히 개최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국제박람회 경쟁 속에서 먼저 영국이 수정궁을 짓고 개최한 1851년 런던 엑스포가 세계박람회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 철근과 판유리로 만들어진 새로운 소재와 건축기술과 신형 증기기관차, 전신전보기술을 선보였다. 이후 1853년 미국 뉴욕에서는 엘리베이터를,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는 벨의 전화기, 1904년 동력 비행기, 1970년 오사카에서는 무선전화기 등 신기술 소개의 장으로 활용했다.
엑스포는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메가이벤트라고도 한다. 애초 엑스포의 부속 행사 같던 올림픽이나 의외로 시작이 초라했던 월드컵과는 달리 엑스포는 시작부터 과학, 예술, 문화의 세계 교류의 장이었고, 세계 각국들은 그 정치, 경제적 효과를 얻기 위해 국가 원수가 직접 나서서 유치노력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3개의 메가 이벤트가 모두 열렸던 나라는 역시나 주요국 6개(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라고 한다. 금번 엑스포 유치 실패 요인 분석이 내부에서는 뒤늦은 의사결정, 외적으로는 경쟁국이 오일머니로 표를 매수했다거나, 정/재계, 문화계가 한몸이 되어 막판역전을 예상할만큼 선전하여 '졌잘싸'로만 남기면 뭔가 아쉽다. 우리 나라에도 수십조 짜리 프로젝트를 들고 왔던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는 엑스포 유치를 위한 모티브는 네옴시티를 시작으로, 이전에 없었던 것에 도전하는 비즈니스 기회를 제시하였을 것이고, 축구, 골프, 동계 아시안 게임 등 스포츠 뿐 아니라 관광을 위시한 문화 전반을 총체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엑스포 부산 유치를 위해 어떻게 접근했던 걸까? 국가의 장기비전과 정치경제문화를 망라한 총체적인 전략수립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출산율 정책으로 출산장려금 인상이나, 국토균형정책으로 김포의 서울편입, 메가시티 조성 등은 선거 지지율을 떠난 장기적이고 총체적인 국가 전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엑스포 유치 실패와는 달리 장기적 안목이 필요한 정책은 금방 성패가 보이질 않으니 더 신중히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김성수 충남대 에너지과학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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