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일 북-칼럼니스트 |
시간은 오고가는 것이 아니다. 흐르는 강물 속에 닳아가는 돌멩이처럼 그렇게 나동그라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배후(背後)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여전히 천변의 나무들은 '생각의 새'들을 기다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산책을 한다. 원래 길은 보이지 않는 법. 우리는 매일 매일 생겨나는 길을 보기 위해 침묵해야 하며, 헐벗은 나무의 몸에 난 얼어 터져 빛나는 상처를 눈에 담아야하며, 어두운 땅 속에서 숨을 쉬며 꿈을 꾸고 있는 씨앗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속도와 경쟁하는 부산한 삶 속에서 길을 내며 살아간다. 그 길 위에 긴 여운을 남긴 채 침묵 속, 앙상한 나무의 마른가지에 '결핍'이란 생각의 새가 날아와 앉는다. 결핍은 채워지지 않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의미를 자꾸 흘리곤 하는 철 지난 외투의 구멍 난 주머니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끝끝내 아무것도 소화하지 못하지만, 결핍된 우리를 집어 삼키지는 않는다. 한 사내는 지난여름, '숨, 쉼, 신음'을 선물했던 풍요의 잎사귀들이 낙엽 되어 쌓인 산책길을 걷고 있다.
'결핍'된 나무 가지에는 사이가 벌어진 틈이 많아서 생각의 새들이 날아와 깃을 치고 알을 낳을 수 있다. 한 사내는 '여유 공간이자 유희 공간'인 알의 세계에 들어가 '만보(萬步)걷기'는 잊어버리고 '심심함'이란 '심보(心褓)닦기'를 치른다. 속도를 베어 시간에 숨을 트이게 하고 싶은 우리네 일상 속에서 심심함이란 가장 천진한 상태의 외로움이다. 그것은 사람이 무언가를 하게하는 힘 때문에 이미 어떤 것을 향해 손짓하는 에너지이다.
심심함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으로 백자 달 항아리 원 안에서 무심한 마음을 빚고 있을 것 같은 마음의 상태를 이름이다. 깊은 심심함, 그것은 속도에 경직 된 세계에서는 느껴 볼 수 없는 무(無)로 채워진 무위의 상태를 가리킨다. 금년에 그것은 가장 많이 귀를 드나들었고, 여전히 실행하지 못한 '내려놓음'의 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무거워지는 발걸음에 발맞추며 되새긴다.
이른 산책을 끝마치며 오르는 공원 계단 옆으로 억새의 마른 대궁들은 불어오는 찬바람에 "서걱~ 서걱~~"소리를 내고 있다. 억새는 여름날을 추억으로만 기억하며 내일의 푸른 꿈을 이루기 위해 긴 휴식의 시간에 빠져들고 있다. 아스콘으로 포장 된 도로의 틈에도 작은 무리의 억새가 싹을 띄웠다. 갈라진 틈에서 살아난 생명력, 모진 풍파를 참아내며 살아남은 억새는 이젠 그 삶의 고충이 선물한 결과물인 하얀 꽃을 피우며 씨앗을 맺고 있다.
한 사내는 이제 운동화에 묻은 마른 흙과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오늘 산책은 '우리들 곁에는 항상 생각의 새가 날아와 머무를 수 있는 앙상한 나무가 어제처럼 내일도 있다, 그 나무에 앉은 새는 정신에 깊은 성찰의 새순을 돋게 하고,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누추한 마음을 맑게 씻어주는 "결핍의 깊은 심심함"이란 풍성한 잎 새를 가져다준다'는 깨달음으로 마무리 된다. 내일은 11월3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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