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일정은 전날과 같은 발 페레 버스 종점에서 출발하지만, 우측 순환코스가 아니라 곧장 북쪽으로 직진해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인 페레고개(2537m·Grand Col Ferret)를 넘어가게 된다. 스위스 라풀리(La Fully)마을 초입까지 대략 11㎞를 트레킹한 다음 차를 타고 숙소인 샹페(Champex)까지 이동한다. 샹페는 스위스의 전형적인 산악마을이자 춘천처럼 호반도시다. 호수를 중심으로 식당과 상가, 숙박시설이 모여 있다.
5일째를 맞은 일행은 서서히 체력에 한계를 보이는 듯했다. 숙면하지 못하고 이른 아침부터 일정을 시작하다 보니 입술이 부르트고 체온조절에 실패해 쇳소리를 동반한 기침 감기로 고생하는 일행이 나타났다. 배앓이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페레고개로 가는 중간에 내려다본 엘레나 산장. 뒤로 프레 드 바 빙하가 금방이라도 산장을 덮칠 듯하다. 왼쪽 높은 봉우리가 에귀 트리올레(3870m).(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페레고개를 넘어 푈르 산장의 화분에 스위스의 국화인 에델바이스가 활짝 피었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피해 엄마를 따라 집을 뛰쳐나온 셰릴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고 늘 긍정적이었던 엄마가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패닉상태에 빠진다. 마약과 불륜, 이혼 등 폐인 생활을 전전하다 PCT를 알게 돼 무작정 배낭을 꾸려 길을 나선다. 자력으로 일어서기조차 힘든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그녀는 등산화마저 잃어버리고 발톱마저 빠져나가는 고통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온갖 고초 끝에 차츰 트레일에 적응해 마침내 완주하고 자아를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셰릴은 길을 걸으면서 자신을 도와준 동료들은 물론 성추행하려던 사내들과 위선 덩어리 인간들을 대하면서 고마움과 미움, 분노를 느끼지만 이 모든 일상적인 감정이 PCT를 완주하게 한 동력이라는 걸 깨닫는다. 셰릴은 그제야 엄마가 폭력적인 남편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너희들이 태어났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긍정 마인드를 이해하고 엄마의 죽음을 고이 간직한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천신만고 끝에 첫 번째 산장에 도착했을 때 산장지기가 온갖 것을 짊어지고 온 셰릴의 배낭에서 불필요한 용품을 정리해주는데 콘돔 한 갑이 튀어나오자 한심한 표정을 짓는다. 셰릴은 통째로 버리려다 콘돔 한 개만 슬그머니 빼내 챙긴다. 자신을 PCT에 무책임하게 내팽개친 게 아니라 삶의 의지를 하나씩 긍정적으로 정립해나가는 장면으로 받아들여진다. 트레킹 중간중간 여행자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면서 트레커들 사이에 '셰릴'이 회자되기 시작한다. 여성 혼자 PCT를 종주하는 위대한 셰릴 스트레이드로 명성을 얻는다.
발 페레 버스종점까지 이동한 다음 차드장데소(Tza de Jean Desot)를 지나 프레드바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발 1800∼2000m 사이에 펼쳐진 평원의 초지 위에 소떼가 아침 풀을 뜯고 있었다. 광활한 초원 위로 울긋불긋 등산복을 차려입은 트레커들이 런웨이를 펼쳤다. 중간에 뒤돌아보니 해발 2050m에 자리 잡은 엘레나 산장의 뒷배경에 트레커들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에귀 트리올레(3870m)와 프레 드 바 빙하를 등진 명당이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인 페레고개(2537m·Grand Col Ferret)에서 트레커들이 프레 드 바 빙하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목적지인 샹페까지 좀더 일찍 도착해 쉬고 싶은 생각에 하산길을 재촉했다. 일행은 목적지를 2㎞쯤 남겨두고 푈르산장(Alpage de La Peule)에서 생맥주로 말라붙은 목을 축였다. 푈르산장에는 이날 하루 행보를 마감하려는 트레커로 북적였다. 산장 마당 가장자리에 소담스럽게 자라는 에델바이스가 트레커들의 눈길을 끌었다.
라풀리에 도착한 일행은 소형버스를 타고 샹페로 향했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라풀리에서 샹페구간 트레킹은 건너뛰는 셈이다./김형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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