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갈비 모습 |
이른 시간에 연락하기는 실례인 것 같아 예당저수지(禮唐貯水池)로 향했다. '고덕갈비'는 예당저수지를 찾는 많은 조사(釣士)들의 입소문으로 더 많이 알려진 맛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애마를 운전해 가는데, 멀리 예당호 출렁다리가 보이는 지점에 갑자기 촬영 포인트가 눈에 들어온다. 차에서 내려 스마트폰을 꺼내 구도를 맞춰 보니 한 폭의 산수화가 눈에 들어온다. 예당저수지에서 사진 한 장 건지고 앙상한 가지에 붉게 익은 사과밭을 지나 고덕면 소재지에 들어오니 아침 10시다. 이 회장에게 전화하니 덕산 사우나를 막 나오는 중이라 한다. 비록 맛 투어라 해도 늦은 아침으로 고덕농협 앞에서 맛있는 소머리국밥으로 우선 늦은 조반을 해결했다.
예당 저수지 |
고덕면 대천리 시냇가 양측을 따라 3일과 8일에 5일 장이 열리는 한내장터가 있었는데, 장날에는 장꾼이 오천여 명이 왕래하는 내포에서 가장 큰 장터로 이곳에서 1919년 즉 기미년 4월 3일에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조국 광복을 외치며 독립만세를 부르던 현장이다. 이 회장은 고덕만세공원 조성에도 1000만원을 쾌척한 기록이 기념비에 새겨져 있었다.
한내장4.3운동기념비와 기념사업회 초대회장 이명범 |
그러면서 소복옥의 갈비가 소문이 나고 손님이 몰려들자 1958년 다시 상호를 '소복갈비'로 변경해 지금까지 5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소복갈비는 '대통령 갈비집'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는데, 고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오찬 메뉴가 바로 소복갈비라고 한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행사였는데, 그날 삽교천방조제 행사를 마치고 아산 도고별장으로 소복식당의 양념갈비 100인분을 주문해서 맛있게 드셨다고 한다. 그 후 전두환, 김영삼, 노무현 등의 전직 대통령들은 물론 국회의원들까지 소복식당을 향한 발걸음은 끝이지 않았다고 한다.
삼우갈비는 소복갈비에서 일하던 이천종 아주머니가 1986년에 따로 가게를 차려 시작한 갈비집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복갈비와 삼우갈비는 미리 구워져 나오는 방식이 같고 밑반찬, 설렁탕, 굴젓 등이 나오는 푸짐함이 유사하다.
고덕갈비 식당 전경 |
고덕은 옛날 구만리의 구만포를 통해 교역이 발달한 곳으로 현재는 없어졌지만, 근방에서 제일 큰 우시장이 형성되었던 재래시장이 있던 지역이다. 고덕갈비(충남 예산군 고덕면 고덕중앙로 86 대천리 727-2)는 재래시장 인근에서 연탄불 세 개를 놓고 목로점을 하며 양념한 소갈비를 구워 팔면서 시작되었다.
불고기나 갈비를 굽는데, 물론 참숯이 좋기는 하지만 갈비 굽기에는 화력이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는 연탄불도 상당히 좋다. 이 집은 오로지 한우갈비, 단일 메뉴만 있는 곳으로 맛에 대한 정직함과 전문성을 동시에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한우 암소갈비에 간장과 다진 야채로 아주 살짝만 간을 맞춘 후 연탄불에 구워 먹으면 되는데 양념 맛이 세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고기의 뒷맛을 받쳐주고 여기에 불향이 덧입혀져 일반 양념갈비와는 또 다른 맛을 즐겨볼 수 있다.
오후 4시 정도면 그 날 장만한 갈비가 다 소진되어 문을 닫는다고 하는 고덕갈비는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맛집이다. 오늘은 다행히 비어 있는 한자리가 있어 대기하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가 있었다. 둥근 식탁 가운데, 구멍탄 불이 붉게 이글거렸다.
개방된 주방에는 사장의 촘촘한 칼질로 부드러워진 고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사장에게 작업하는 광경을 사진에 담도록 해 달라니 칼을 잡고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덕갈비 칼집내는 모습 |
초벌구이 한 암소한우갈비 두 대가 연탄불 위로 올라간다. 특히 소스로 나온 고추장을 찍어 먹어도 맛있다. 고향의 맛을 아는 이 회장께서는 마늘을 얹고 상추쌈을 싸 드신다. 역시 고덕갈비 맛을 안다는 포스다. 고덕갈비 덕산점은 형이 하고 있고, 동생은 고덕갈비 원래의 자리에서 계속 이어나가고 있으며, 양념도 동생이 만들어 형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고덕갈비 연탄불 |
여기서도 갈비는 협(脇)으로 나온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이 어휘에 대한 풀이와 올바른 용법을 제시하여 1819년에 저술한 유서(類書) 『아언각비(雅言覺非)』에도 우협(牛脇)을 갈비(曷非)라 하고 갈비에 붙은 고기에서 고기만 떼어서 파는 것을 갈비색임이라 하였으며 갈비 끝에 붙은 고기를 쇠가리라 하였다. 쇠가리를 푹 고아서 끓인 가리탕이 1890년 궁중연회상차림에 보이나 갈비는 고려시대전부터 먹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해동죽지(海東竹枝)』(1925)에는 '설야적(雪夜炙)'이 나오는데, 개성부(開城府)의 명물로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해 굽다가 반쯤 익으면 찬물에 잠깐 담갔다가 센 숯불에 다시 굽는다. 눈 오는 겨울밤의 안주로 좋고 고기가 매우 연하여 맛이 좋다'고 하였다.
조선의 종묘 예절을 기록한 『종묘의궤(宗廟儀軌)』에도 갈비(乫非)가 나오며, 『일성록(日省錄)』정조(正祖)16년(1792)윤4월23일 자에 '갈비족적(乫非足炙)'이 나오고, 이 당시 갈비찜(乫非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조시기에는 한문으로 갈비(乫非)라고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의전서(是議全書)』 [음식방문]에서는 '가리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가리를 두치 삼사푼 길이씩 잘라서 정히 빨아 가로결로 매우 잘게 안팎을 어히고(자르고) 세로도 어히고 가운데를 타(갈라) 좌우로 젖히고 가진(갖은) 양념하여 새우젓국에 함담(간) 맞추어 주물러 재여 구어라"고 했다.
1913년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朝鮮調理製法)』에도 가리구이라는 조리법이 나와 있고, 1924년에 출판된 이용기(李用基 1870~1933)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갈비구의'라고 적은 다음에 '가리쟁임'과 '협적(脅炙)'이라는 다른 명칭을 붙였다. '구의'는 구이의 다른 표기이다. '가리쟁임'은 가리를 양념하여 재여 두었다가 굽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
고덕갈비 |
조풍연(趙豊衍, 1914~1991)의 『서울잡학사전』을 보면 1939년에 서울 낙원동에 갈비집이 있었다고 했다. 그 집에서는 냉면과 함께 가리구이를 팔았다. 당시 저녁 늦은 시간에 극장이나 요리옥·카페·바 등이 끝나면 술 깨는 데 냉면이 좋다고 하여 갈비집에 손님이 몰려들었다.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냉면과 함께 갈비 두 대를 시켰다. 왠지 가리구이 달라고 하면 복잡하였고, 간단히 줄여서 '갈비 두 대'라고 했다. 이로부터 갈비 하면 가리구이가 되어 버렸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갈비구이는 선술집에서 술안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그 값도 보통 한 대에 얼마 혹은 두 대에 얼마 이런 식이었다.
1930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강릉의 식당 요리 가격을 기사로 다루었다. 국밥 한 그릇에 15전인데 비해 갈비 한 대는 5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갈비구이 한 대 값이 설렁탕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1920년대 이후 갈비구이는 선술집의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고, 갈비찜은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고급음식이 되었다.
그밖에 동양루, 부벽루등이 생겨났으며 점차 전남 송정리, 수원갈비, 예산갈비 등 여러곳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갈비집이 늘어나게 되었다. 결론은 갈비집 이란 명칭은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들에 의해 생긴 역사가 그리 얼마 되지 않은 신종어이지만, 요즘 사람들에게 가리구이라 하면 몇 사람이나 알아듣겠는가. 결국 1970년대 초 국어사전 편찬 위원들도 개정판 사전을 집필하게 될 때, 토론 끝에 전국적으로 갈비로 통용이 되다 보니 시류에 따르자며 20여명의 위원 중 단 두 사람만 반대했고 다수의 찬성으로 '가리' 대신 '갈비'를 표준어로 택했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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