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변호사 |
시작은 올해 5월의 어느 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비 내리던 야외 콘서트장에서 듣던 노래에 마음이 풀려버렸다. 그날도 아주 오랜만에 잡은 일종의 여행이었는데,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행복감에 눈물이 났다가, '왜 지금 나는 이렇게 행복하지 못하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람마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쉬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변화를 얻기 위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을 위해서거나 공부를 위해서 떠나는 것을 보통 여행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목적은 있으되, 특별한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할까.
나의 목적은 나 자신의 변화였다. 달라지고 싶어서.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침에 눈 뜨는 것이 좋을 만큼은 살고 싶었다. 당시에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부차적이거나 사치스럽다고 생각될 만큼 삶이 팍팍해져 있었다. 번아웃(Burnout) 상태였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사소한 것까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 탓에 점점 스스로를 궁지로 몰고 있었는데도 잘 고쳐 지지가 않았다. 비 오는 오월의 오후, 우비를 입고도 푹 젖어버린 채로 들었던 노래는 이랬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너의 맘이 편할 수 있는 곳. 그게 어디든지 얘기해줘'-선우정아, 도망가자(Run With Me)
여행을 통해 결국 내가 변했을까. 조금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똑같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는 동안 온갖 사소한 것들에 휘둘리는 나를 보면서, '역시 나답다'는 생각을 해야 했으니.
여행의 일상은 단순하다. 어디론가 떠나고, 밥을 먹을 곳을 찾고, 잠을 잘 곳을 정하는 일 정도만이 남는다. 생각해보면, 원래 가려던 곳을 못 가게 되었다고 해서, 맛없는 음식으로 한끼를 때웠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이 맛이 없다는 이유로, 예약한 숙소가 인터넷 광고와 다르다는 이유로 나는 계속 화를 내고 있었다.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라면 여행보다는 집에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있고자 하는 것, 모든 예상 가능한 어려움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여행을 떠나는 마음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모든 불안을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도, 만일을 대비하고자 안 좋은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돌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헛웃음이 났다.
미래의 불확정 변수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은 마치 쓴약을 미리 먹고 나머지 달달한 것들만 남겨두고 싶은 마음과 같다. 그러나 인생이 그런 식으로 가지는 않는다. 달다가도 쓰고, 쓰디쓴 것이 되돌아보면 오히려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의 기분이 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최선의 규칙으로 삼고, 내 옆에 있는 동반자의 행복을 위안으로 삼고자 했다.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이다. 물론 그것들 말고도, 여행이 줬던 아주 빛나는 순간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진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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