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마예르 방면 셔틀버스 승강장 너머로 멋진 대산괴가 펼쳐져 있다. 앞쪽 바위산 에귀 뒤 샤틀레(2523m)와 그 뒤로 에귀 블랑슈 드 푸트레이(4112m), 몽블랑 드 쿠르마예르(4765m) 사이로 브루야르(안개) 빙하가 보인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이탈리에서의 첫 조식부터 눈길을 끌었다. 서버에 담긴 커피가 유독 맛이 진하고 감칠맛이 돌았다. 가이드 실비에게 "혹시 에스프레소?"라고 운을 떼자 "그런 것 같다"고 맞장구치면서 호텔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에스프레소? 노! 아메리카노"라고 시크하게 대답했다. 에스프레소 원조국의 자존감이다.
오전 8시쯤 쿠르마예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쿠르마예르 북동쪽 발 페레(Val Ferret)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이날 트레킹은 1시간쯤 버스를 타고 발 페레 버스 종점에서 내려 해발 2000m 능선을 타고 시계방향을 따라 타원형으로 한 바퀴 순환하게 된다. 이 코스가 유명한 이유는 서쪽으로 그랑 조라스(4208m), 몬테 그루에타(3686m), 프티 조라스(3650m) 등 빼어난 대산괴와 그랑 조라스 빙하, 트론세이 빙하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대했던 절경을 우리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을 태세다. 아침부터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아 호텔을 나설 때부터 판초우의로 상체와 배낭을 감쌌다. 이런 날씨라면 산에 운무가 가득해 절경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 오늘 순환코스는 10㎞밖에 되지 않고 상승고도도 많지 않아 체력적인 부담은 덜 되는데 날씨만 협조해주면 금상첨화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나 해발 2000m의 초원지대에 들어서자 특유의 가축 냄새가 진동했다. 방목을 하는 양과 소무리가 우중에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풀이 양껏 자라는 여름 한철이 방목 시즌이다. 목장주는 방목 때 여기로 이동해 유유자적 소를 살찌우고 겨울철에는 농가일로 바쁜 한해를 보낼 것이다.
제임스 C. 스콧은 저서 '농경의 배신'에서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정착 농경생활과 떠돌이 수렵채집을 병행했다고 주장한다. 힘든 수렵채집을 포기하고 농사에만 전념하면서 도시와 국가가 탄생한 게 아니라는 논리다. 그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행복지수가 높아졌다는 설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정착농경생활만으로는 기근, 가뭄, 혹한기 등에 대처하기 어려워 대안으로 원거리 수렵채집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농사와 수렵채집을 병행하는 동안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풍요롭고 다양한 음식물을 섭취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폭력집단이 보호비(Protection Racket)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면서부터 강제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정착생활을 하면 세금을 거두기 쉽다. 곡식이나 협과만을 재배하도록 강제한 이유도 세금으로 환산하기 쉽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만 보더라도 수탈이나 다름없다. 관아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양민들이 산으로 피신해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특히 조선시대 공도(空島)정책은 세금을 내지 않고 섬으로 도망가는 이탈을 방지하고자 시행한 소개령인데 결국 독도의 영유권 분쟁과 항해술의 퇴보라는 역효과를 야기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등산 인구가 늘고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간혹 큼직한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르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도토리나 밤, 버섯, 산나물을 채취하려는 이들이다. 불법이라는 점을 여러 번 고지해도 우리의 DNA에 깊게 박힌 수렵채집인의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는 듯하다.
트레커들이 우박이 내리는 악천후를 뚫고 하산하고 있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왼쪽 가장 높은 봉우리가 그랑 조라스. 오른쪽 산이 몬테 그루에타. 가운데 그랑조라스 빙하, 트론세이 빙하 등이 보인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점심을 먹으면서 우박이 그치기만을 기다리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결국 일행은 우박을 맞고 하산하기로 했다. 등산로에는 우박 알갱이가 쌓이고 골이 파여 빗물 빠르게 흘러내려 갔다./김형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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