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뒤 몽블랑을 가다] 11-비를 뚫고 그랑조라스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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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 뒤 몽블랑을 가다] 11-비를 뚫고 그랑조라스 앞에 서다

이탈리아의 절경 발 페레 순환코스 폭우로 발목
수렵채집인처럼 악천후 뚫고 전진 또 전진
딱 10분간 열린 대산괴의 웅장함에 감탄

  • 승인 2023-11-21 09:47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미아지레스토랑
쿠르마예르 방면 셔틀버스 승강장 너머로 멋진 대산괴가 펼쳐져 있다. 앞쪽 바위산 에귀 뒤 샤틀레(2523m)와 그 뒤로 에귀 블랑슈 드 푸트레이(4112m), 몽블랑 드 쿠르마예르(4765m) 사이로 브루야르(안개) 빙하가 보인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몽블랑트레킹이 나흘째 중반전에 접어들었다. 초반 프랑스 구간이 우리나라의 고산지대와 비슷하다면 이탈리아 구간은 빙하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히말라야산맥 느낌마저 내뿜는다.

이탈리에서의 첫 조식부터 눈길을 끌었다. 서버에 담긴 커피가 유독 맛이 진하고 감칠맛이 돌았다. 가이드 실비에게 "혹시 에스프레소?"라고 운을 떼자 "그런 것 같다"고 맞장구치면서 호텔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에스프레소? 노! 아메리카노"라고 시크하게 대답했다. 에스프레소 원조국의 자존감이다.

오전 8시쯤 쿠르마예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쿠르마예르 북동쪽 발 페레(Val Ferret)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이날 트레킹은 1시간쯤 버스를 타고 발 페레 버스 종점에서 내려 해발 2000m 능선을 타고 시계방향을 따라 타원형으로 한 바퀴 순환하게 된다. 이 코스가 유명한 이유는 서쪽으로 그랑 조라스(4208m), 몬테 그루에타(3686m), 프티 조라스(3650m) 등 빼어난 대산괴와 그랑 조라스 빙하, 트론세이 빙하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대했던 절경을 우리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을 태세다. 아침부터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아 호텔을 나설 때부터 판초우의로 상체와 배낭을 감쌌다. 이런 날씨라면 산에 운무가 가득해 절경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 오늘 순환코스는 10㎞밖에 되지 않고 상승고도도 많지 않아 체력적인 부담은 덜 되는데 날씨만 협조해주면 금상첨화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나 해발 2000m의 초원지대에 들어서자 특유의 가축 냄새가 진동했다. 방목을 하는 양과 소무리가 우중에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풀이 양껏 자라는 여름 한철이 방목 시즌이다. 목장주는 방목 때 여기로 이동해 유유자적 소를 살찌우고 겨울철에는 농가일로 바쁜 한해를 보낼 것이다.

제임스 C. 스콧은 저서 '농경의 배신'에서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정착 농경생활과 떠돌이 수렵채집을 병행했다고 주장한다. 힘든 수렵채집을 포기하고 농사에만 전념하면서 도시와 국가가 탄생한 게 아니라는 논리다. 그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행복지수가 높아졌다는 설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정착농경생활만으로는 기근, 가뭄, 혹한기 등에 대처하기 어려워 대안으로 원거리 수렵채집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농사와 수렵채집을 병행하는 동안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풍요롭고 다양한 음식물을 섭취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폭력집단이 보호비(Protection Racket)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면서부터 강제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정착생활을 하면 세금을 거두기 쉽다. 곡식이나 협과만을 재배하도록 강제한 이유도 세금으로 환산하기 쉽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만 보더라도 수탈이나 다름없다. 관아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양민들이 산으로 피신해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특히 조선시대 공도(空島)정책은 세금을 내지 않고 섬으로 도망가는 이탈을 방지하고자 시행한 소개령인데 결국 독도의 영유권 분쟁과 항해술의 퇴보라는 역효과를 야기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등산 인구가 늘고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간혹 큼직한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르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도토리나 밤, 버섯, 산나물을 채취하려는 이들이다. 불법이라는 점을 여러 번 고지해도 우리의 DNA에 깊게 박힌 수렵채집인의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는 듯하다.

우박
트레커들이 우박이 내리는 악천후를 뚫고 하산하고 있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순환코스를 돈 지 1시간만인 오전 10시 10분쯤 첫 번째 뷰포인트에 도착했지만, 운무가 산허리 위로 가득 차 윤곽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모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20분쯤 더 전진했다. 때마침 비가 잦아들고 서서히 아침 이슬이 걷히기 시작하더니 눈앞에 짙은 회색의 그랑 조라스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물 먹은 거대한 숯 검댕처럼 흑백사진을 보는 듯했다. 그랑 조라스를 중심으로 여러 빼어난 산군들이 포진해있고 그 사이로 빙하가 세 갈래로 뻗어 내려와 마치 먹과 여백으로 빚어낸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모두 탄성을 지르며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완벽한 자태를 보여준 건 아니지만 이 정도 허락해준 것도 감사한 일이다. 10분 정도 지나니 그랑 조라스는 다시 운무 속에 자취를 감췄다.

그랑조라스
왼쪽 가장 높은 봉우리가 그랑 조라스. 오른쪽 산이 몬테 그루에타. 가운데 그랑조라스 빙하, 트론세이 빙하 등이 보인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기념촬영을 마치니 다시 빗줄기가 거세졌다. 가이드 실비가 빨리 떠나자고 재촉했다. 일단 3㎞쯤 떨어진 월터 보나티 산장까지 이동해서 거기서 점심을 먹으려는 계획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월터 보나티 산장도 비를 피하려는 트레커로 북새통일 것이다. 실비가 산장에 전화를 걸어 자리를 예약했다. 산장지기와 절친 사이다. 유명한 등반가의 이름을 딴 보나티 산장은 시설이 좋기로 평판이 자자하다. 산장에 도착할 때쯤 비는 우박으로 돌변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유리구슬 크기의 우박이 하늘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듯 바닥에 내리 꽂혔다. 머리와 어깨에 떨어지는 묵직함과 따끔함이 판초우의를 뚫고 전해졌다.

점심을 먹으면서 우박이 그치기만을 기다리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결국 일행은 우박을 맞고 하산하기로 했다. 등산로에는 우박 알갱이가 쌓이고 골이 파여 빗물 빠르게 흘러내려 갔다./김형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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