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횡성까지 가서 지역의 '아기장수'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연극 한 편을 보고 온다.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늘 그렇듯 민중영웅 설화의 종국은 비극이다. 겨드랑이의 날개를 지질 수밖에 없는 그 설화의 세계, 그 연극이 좋든 아니든, 운명의 가련한 주인공을 저 물밑에서 끌어올려 본다. 누가 그이를 주저앉혔는가. "그게 공동체의 안녕이랍시고..." 연극이 못내 찜찜하다. 그날따라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앞차 꽁무니의 뻘건 브레이크등이 유난스럽다. 그 껌뻑대는 브레이크등을 오브제로 '영웅 없는 공동체'를 무대에 만들고, 그 극적이지 않은 극적인 것을 만드는 환상을 좇는다. 연극의 과제는 어쩌면 그 수 없는 '위기'의 정체를 밝히고. 그 '위기'에서 '선택'의 기로에 있는 우리의 얼굴을 찾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대전예술의전당에서 <멋진 신세계>(A.L.헉슬리 원작, 고선웅 연출)를 보고 나온다. 왜 지금 우리는 1930년대에 상상했던 2540년의 미래를 만나야 하는지, 근 백 년 후, 2023년에 상상한 신세계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나는 구석구석 무대를 살펴본다. 우리가 그토록 세계를 탐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무대 위에 펼쳐진 상상의 신세계는 여전히 불편하기만 하다. 극 중 '무스타파 몬드'총통이 "사실상 당신을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라고 말하자,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라고 야만인 '존'이 대답한다. 그 '안락하지 않은 삶'의 선택,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의 질문에서의 '멋진 신세계'의 만남이라고 여기게 된다. 저 무대 위의 똑똑한 바보들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변두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나는 비로소 드라마에서의 실존을 확인하며, '존재'를 찾았다고, '의미'가 만들어졌다면서 자판을 누른다.
스무 살 때였던가, 창작 수업을 듣는데 강단의 선생님이 뜬금없이 백지를 꺼내서, '검은 점'을 찍고 무엇이 보이는지 우리게 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검은 점'이 보인다고 대답을 했더니, '문학의 정신'을 들먹이며, '검은 점'의 세계에 현혹되지 말고, 이 백지의 수많은 흰점이 모여 있는 세계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설교를 한참 들었더랬다. 그런데 오늘의 연극을 보면서 나는 그 연극이 바라는 신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이제야 수많은 흰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의 비극을 눈치챈다. 우리가 그 '검은 점'들이 만들어낸 위기에서 스스로 쓸모를 잊고 살고 있다는 것을. 저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위기'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전환점'을 만들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저이들에게 맡겨놓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연극의 수많은 장면을 거듭 보면서도 내가 극장에 다니는 것이 이야깃거리를 위해 지상과 지하의 계단을 수없이 오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극단 홍시의 <이별의 말도 없이> 대본을 다시 꺼내 읽다가 '역전할매'의 대사 한 구절을 옮긴다. "세월이 가는 거간듀? 쌓이는 거지. 여기 이 머리에, 여기 이 가심에... 나 보다 앞서 가는 것이 있으믄, 잘 가라고 하면 되고, 그놈하고 같이 가고 싶으믄, 질뚝거리믄서라도 죽어라고 쫓아가믄 되는 거고..."라고. 어쩌면 '흰 점'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닌지, 그 목소리가 극장에 남아있어야 내일의 연극도 또 안녕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무대를 넘겨보고 또 넘어보고. 그 이야깃거리를 위해 나는 극장을 향해 또 걷는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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