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민 교사. |
흡사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의 마음이었다. 따뜻한 배움이 일어나길 바랐고, 아이들의 성품이 성장하며 단단해지길 바랐다. 우리의 작은 세상에 맑은 샘물을 만들고 싶어 고군분투했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인정하고 선생님으로서의 기쁨과 보람도 느끼고 싶었다.
상상 속에 존재하는 '배움의 샘물'은 마치 신기루 같아서 한 뼘 다가가면 어김없이 또 멀어졌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나에게서 무엇이라도 배웠을까?' 매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자기 의심이 버거워 올해는 차라리 내려놓음을 연습하기로 했다. 그러자 뒤늦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보인다.
수학 시간엔 칠판에 문제를 쓴다. 도전해보겠다는 아이들이 손을 든다. 한 아이가 칠판 앞에서 긴장했는지 실수를 하고 만다. 몇몇 아이들이 훈수를 두었을 때, '선생님은 친구가 다시 풀 수 있게 기다려줄 거야. 너희는 응원해줘.' 말한다. 그러자 한두 아이의 목소리에서 시작한 '유 캔 두 잇!'이라는 구호가 어느덧 모든 아이의 목소리가 됐다. 지금도 교실에서 작은 실수가 생길 때마다 누군가는 놓치지 않고 선창한다. '유 캔!' 매번 아이들이 응답하는 목소리가 정겹다. '두 잇!'
미술 시간엔 '선생님 소원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열심히 색칠해서 진짜 멋진 협동화를 완성해보는 거야.' 덧붙였다. 그러자 평소 가까웠던 친구들과 서먹했던 친구들이 모두 얼굴을 맞대고 색연필을 고른다. '내가 왼쪽 나무를 이 색연필로 칠했어! 너도 오른쪽 나무는 이 색연필을 써!' 아이들끼리 자기 작품을 가져다 친구 작품과 이리저리 맞춰보기도 한다. 괜히 흐뭇하다.
체육 시간엔 열심히 하다 넘어져 훌쩍이는 아이가 있다. 아이들은 교실로 달려와 누가 무엇을 하다가 운다며 나에게 알린다. '그럼 너희가 친구 옆에 가서 있어 줘.' 속삭인다. 그러자 정말로 옆에서 가만히 있어 주는 아이, 넘어져서 안 아픈지 물어봐 주는 아이, 넘어져도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아이, 우는 친구를 웃겨 보겠다며 개그를 서슴지 않는 아이가 한데 엉켜 부산스럽다. 그래도 예쁘다.
작년에는 인성교육에 집중해보겠다며 아이들과 도덕 공책을 펼쳤다. '이번 주에는 끈기의 의미를 배워보자.' 아는 것은 곧 실행할 수 있을 거라는, 소크라테스식 활동을 한 것이다. 올해는 도덕 공책을 펼치지도, 협동이나 배려의 '의미'를 배우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은 어딘가 성장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왜 그동안 배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교실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미소 짓게 되는 순간은 꽤 소박하다. '유 캔 두 잇'을 외치는 목소리, 옹기종기 모여 색연필을 고르는 진지한 얼굴, 속상한 친구 옆에 둘러앉아 나름대로 건네는 최선의 위로. 내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이게 바로 아이들이 가진 샘물이구나. 드디어 깨달음을 얻는다. 나의 기쁨은 이미 교실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멋진 작품을 완성해보자는 나의 말 한마디에서, 실수하는 아이를 기다려주자는 나의 작은 행동에서 시작됐다. 아마 아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덕목을 실천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서 배려와 협동과 사랑을 발견하는 나는 충분히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사색의 그물에 붙잡혀 있을 뿐, 깨달음은 늘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걸 깨우친 싯다르타가 생각난다. 따뜻한 배움은 처음부터 여기에, 우리 교실에, 나에게, 아이들에게 있었다. 내가 올해 발견한 예쁜 샘물에서, 언젠가 아이들도 시원한 물을 길어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여지민 온양천도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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