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 : 阿(언덕 아/ 아첨하다) 諛(아첨할 유) 苟(구차할 구) 容(얼굴 용)
출 전 : 소설 조선왕조 500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비 유 : 남의 환심(歡心)을 사려고 알랑거리며 구차스럽게 행동한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아첨(阿諂)과 구용(苟容)이 없을 수는 없다. 간혹 필요할 때도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정도(程度)가 지나치면 남에게 주는 피해(被害)는 엄청나다.
이는 정도(正道)가 아니고 부정(不正)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아첨과 구용이 이루어진 사례는 많지만 조선시대의 한 부끄러운 단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沙參閣老權初重(사삼합로권초중)
雜菜尙書勢莫當(잡채상서세막당)
처음에는 더덕 정승의 권세가 중하더니,
이제는 잡채 판서의 세력 당할 자 없구나.
더덕(沙蔘)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던 작물로, 중국에서는 주로 약(藥)으로 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구이·무침 등 식재료로도 애용했다. 잡채(雜菜) 역시 예로부터 명절이나 잔칫상에 빠지지 않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맛난 반찬(飯饌)거리다.
광해군(光海君)시절에 한효순(韓孝純)이란 사람은 좌의정까지 올랐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임금에게 더덕을 넣은 꿀떡[蜜餠]을 바쳐 '더덕정승(沙蔘政丞)'이라고 수군댔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떡이기에 그 높다는 정승 자리까지 얻을 수 있었을까?
한편 이충(李沖)이란 사람은 요리를 얼마나 잘했는지 광해군은 꼭 그가 만든 반찬이 상에 올라야만 수저를 들었다고 한다. 특히 신선한 각종 채소를 섞어서 만든 잡채 요리가 그의 주 메뉴였다. 그 요리 솜씨 덕분에 이충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고, 벼슬이 호조판서까지 이르렀지만, 백성들은 그를 '잡채판서(雜菜判書)'라 부르며 조롱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한효순의 집에서 만드는 더덕요리와 이충 집안의 잡채가 그 맛이 특별나고 독특했다고 기록해 놓았는데, 시중에서는 두 사람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바쳐 광해군의 총애(寵愛)를 받아 출세(出世)했다고 비꼬았던 것이다.
맛있는 더덕요리를 탐닉했던 광해군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후 처음에는 강화도로 유배(流配)를 가 그곳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덤불로 담장을 친 집에 갇혀 지냄)되었다. 하루아침에 바뀐 처지가 비통해 식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당시 광해군을 감시하던 강화별장이 목격담을 기록했다.
"광해가 하루 종일 밥을 물에 말아 겨우 한두 수저를 뜰 뿐 다른 것은 먹지를 못해 기력이 쇠약해졌는데 언제나 목이 메어 울고만 있다."
비록 쫓겨난 임금이지만 인간적인 연민(憐憫)을 느낄 만도 한데 유배지로 따라간 한 계집종이 쫓겨난 임금이라고 함부로 대하자 참다못해 광해군이 하녀를 꾸짖었다.
그러자 하녀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따지고 대들었다.
"영감이 일찍이 임금 자리에 있을 때 무엇이 부족해 염치없게 아랫사람에게 반찬까지 요구해서 심지어 잡채판서, 더덕정승이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하였소?"
이 말은 잡채를 잘 만들어 호조판서가 된 이충과 더덕 요리로 총애를 받은 좌의정 한효순, 국수를 별미로 만들어 바친 함경감사 최관을 두고 한 말이다.
하녀의 패악이 계속 이어졌다.
"영감이 임금의 자리를 잃은 것은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지만 우리는 무슨 죄가 있다고 이 가시덩굴 속에서 갇혀 지내야 한다는 말이오?" 하녀의 악다구니를 들은 광해군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못하고 탄식만 했다.
부질없는 욕심이 무엇이기에 광해군을 나락(奈落)으로 떨어뜨렸을까?
그 옛날 임금에게 바쳐진 더덕과 잡채의 맛은 달콤했지만, 이로 인해 이 땅의 백성들은 안타깝게도 쓰디쓴 혹정(酷政)에 신음해야했다.
사기 평진후주부열전(史記 平津侯主父列傳)에 安危在出令 存亡在所用(안위재출령 존망재소용) 곧 나라의 안위(安危)는 어떤 정책을 내는 가에 달려있고, 나라의 존망(存亡)은 어떤 사람을 쓰는 가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위 공직자를 비롯해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청탁을 일삼는 것을 금하도록 한 이른바 '김영란 법'을 두고 있다.
어떤 시대이든 간에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부정이 만연할 때 부정한 방법인 '아부'와 '구용'이 더 기승을 부린다.
이럴 때 일수록 국가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올바른 도리를 신조로 행동함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의 고충을 덜어주는 태평의 성대가 이룩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집단을 향해 이렇게 일갈(一喝)하고 있다.
上流旣濁 下流難淸(상류기탁 하류난청):윗물이 이미 흐리니 아랫물이 맑기 어렵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교훈이다. 누가 대한민국을 흐려놓고 있는가?
장상현/ 인문학 교수
장상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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