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뉴고개 하산길 초입에서 바라본 서편 전경. 왼쪽 높은 봉우리가 에귀 데 글라시에, 중간에서 약간 오른쪽 구름 덮인 설산이 몽블랑이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프랑스와 이탈리아 경계인 세뉴고개(Col de la Seigne, 2516m)도 한 나라 땅처럼 국경 표시가 없다. 세뉴고개로 가는 궤적을 보면 초반에는 갈지(之)자 형태가 계속되다가 해발 2000m부터는 경사도 15∼20%의 직선 코스가 이어진다. 상승고도 650m, 거리는 5㎞다. 탁 트인 장엄한 산세만 아니면 당장 포기하고 싶은 3일째 고난의 행군이다.
해발 2500m에 다가갈수록 바람이 거세고 차가워졌다. 이윽고 세뉴고개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보였다. 모두 또 한고비를 넘겼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표지석 인근에는 한여름에도 녹지 않은 설빙이 운동장만큼 펼쳐져 있다. 삼삼오오 짝을 이뤄 등산 스틱으로 스키 타는 흉내를 내면서 천진난만하게 나뒹굴었다. 북서쪽으로는 에귀 데 글라시에(3815m), 에귀 드 래글(3553m), 몽블랑(4807m), 그랑조라스(4208m) 등 알프스의 내로라하는 준봉들이 몽유도원도처럼 펼쳐졌다. 그간의 힘든 기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파민이 샘솟았다.
목표를 어렵사리 이뤘을 때 인체는 도파민이라는 물질을 내뿜는다.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을 때 느끼는 최상의 희열감이다. 도파민은 성취감, 행복감, 살아갈 의욕이 부추긴다. 반면 과하거나 부족하면 조현병, 파킨슨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세뉴고개에서 내려오는 도중 뒤돌아본 엘리자베타 산장. 산장 뒤로 보이는 봉우리 에귀 드 트레 라 테트(3930m)를 중심으로 왼쪽 빙하가 렉스블랑슈, 오른쪽이 트레 라 테트 빙하다. 왼쪽 뾰족한 산은 에귀 데 글라시에(3815m).(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마라톤이나 산행 등 장시간 운동을 하는 동호인들은 에너지바나 파워젤을 지참하는 경우가 많다. 파워젤의 주성분은 탄수화물이다. 명함 크기 한 포에 밥 한 공기(100㎉ 이상) 정도의 탄수화물 추출물이 들어있다. 음식물을 통한 탄수화물 섭취는 소화와 흡수까지 서너 시간은 걸리지만 액체는 즉시 에너지로 전환된다. 아마추어들이야 시중에 나도는 파워젤로 충분하지만 성적으로 먹고사는 프로선수와 팀은 상황이 다르다.
'아지노모도를 쳐서 요리를 한 뒤로는 손님이 많아지고 고깃값 양념값은 적어졌으니…성공이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이후 우리나라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고 중 하나다. 아지노모토(味の素)는 세계 처음으로 일본에서 개발된 인공조미료 제품명이자 회사 이름이다. 국물 음식이 많은 우리나라에 제대로 맞아떨어져 일제강점기 때부터 냉면집, 설렁탕집, 중화요리집에서 인기를 끌었다. 해방 후 아지노모토가 한반도에서 품귀현상을 빚자 국내 제품 '味元'이 출시돼 식당은 물론 가정에서도 필수 조미료로 독점적 인기를 유지하다 후발 제품 '미풍'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공교롭게도 '味の素'나 '味元' 두 제품 모두 일본식 발음이 '아지노모토'다. 일본 아지노모토사는 현재 유망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MSG에서 출발해 다양한 식품산업과 의약품으로 업종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좀 전에 근육 경련이 일어난 일행에게 건넨 에너지 제품이 바로 이 회사의 한 브랜드인데 좀 특이하다. 한 포당 열량이 밥 한술 남짓한 17㎉밖에 되지 않는다. 탄수화물이 아니라 아미노산 배합이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지 신기하면서도 여전히 먹어도 괜찮은지 의구심이 든다. 업체는 검증된 제품이라고 장담한다. 대충 이해하기론 장시간 고강도 운동을 하면 근육이 손상되는데 아미노산 배합이 이를 신속하게 복구시켜 운동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과학기술의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마라톤, 철인경기 등 고강도 운동에 뛰어드는 동호인이 늘어남에 따라 다양한 스포츠음료 등 신제품이 잇따르고 있다. 기업의 생리상 대중의 승리욕에 부응하는 제품을 개발하려는 과열경쟁이 마약 물질과 구분이 모호한 제품을 낳는 부작용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대목이다.
세뉴고개 설빙에서 트레커들이 미끄럼을 타며 즐겁게 놀고 있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투르드몽블랑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모두 무료다. 버스를 타고 쿠르마예르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 농로나 다름없다. 버스 한 대 다니기에도 편치 않은 도로 폭이다. 길마저 꼬불꼬불해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을 볼 수가 없다. 커브에서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양쪽 다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유일한 방법이 경적인데 우리나라 시내버스처럼 상냥한 소리가 아니다. 반경 500m 이내에서는 누구나 깜짝 놀랄 기차 화통 삶아먹은 굉음이다.
/김형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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