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대 교수·대전자치경찰위원 |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에너지를 집중하는 인간의 무언의 행위 앞에서는 모두가 엄숙해진다. 그날, 결승선을 향해 자기 몸뚱이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토너들의 몸짓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마라톤은 아마추어들에게 많게는 네 시간 이상을 일정한 속도로 달려야 하는 운동이다 보니 완주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심이 절로 들게 한다. 어느 시인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했듯, 나도 문득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2017년 여름부터 1년간 연구차 뉴욕을 방문했을 때였다. 매디슨가에 거처를 구한 덕분에 아침이면 뉴요커들과 센트럴 파크에서 텐케이(10Km)를 뛰며 맨해튼에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59번 거리와 110번 거리 사이를 남북으로 오가며 연못과 호수 그리고 공원 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후미를 지나 5번가 건너편 구겐하임미술관의 하얀 자태를 확인할 때면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할렘미어(harlem Meer)에서 유영하는 오리 가족은 달려온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비록 뉴욕마라톤은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지만 다른 크고 작은 달리기 대회와 함께 호흡했었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도시에서 '러닝크루'라는 이름의 도심 달리기가 유행하고 있다. 그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자유롭게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모인다. 이런 도심 달리기는 뉴욕, 런던, 베를린, 파리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일찍부터 활발했다. 그 해, 맨해튼 빌딩 숲을 가로질러 이스트 리버와 허드슨 강변을 이어 달리는 모임에 어깨를 나란히 한 기억이 새로웠다.
지난주, 다시 용기를 내어 마라톤에 도전했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아내와 함께 준비하는 과정도 사뭇 좋았지만 나의 인생에서 마라톤과 다시 만날 시간이라는 사실에 감동했다. 마라톤에서는 지구력이 중요한데, 그 비밀은 효율적인 냉각장치에 있다. 땀과 열을 잘 배출한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 잘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비싼 컴퓨터도 쿨링팬이 망가지면 무용지물이듯 열을 식히는 문제는 오래 달려야 살아남는 인간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지구 두 바퀴 반에 맞먹는 길이인 9만5천km에 달하는 혈관의 절반 이상이 우리의 피부에 모여 열기를 식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달려야 존재한다. 공식 마라톤 기록은 여전히 2시간대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력이 뛰어난 달리기 선수로서 장거리에서는 다른 동물들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개들은 매우 빠르지만, 비교적 짧은 거리만 달릴 수 있다. 인간은 제때 충분하게 온몸으로 땀을 흘려 몸이 쉽게 과열되는 것을 피할 수 있지만, 개들은 주로 혀를 통해서만 열을 식히기 때문이다.
샐러리맨들의 급여는 10년 이상 동결인 곳이 흔하지만, 이젠 하루가 다르게 뛰는 물가가 새삼스럽지도 않다. 마라톤은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그래서인가 보다. 어쩌면 우리가 뛰는 물가보다 더 오래 지긋하게 달릴 수만 있다면 결국에는 저만치 앞서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려면 세상사에 분통 터트리는 열기도 과열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땀 흘려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은 초코파이 하나에도 힘을 얻어 좌절과 포기를 딛고 일어나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존재다. 나의 다리는 물론 나의 인생도 감동의 백만불짜리 '말아톤'이 될 수 있다. 비록 서브쓰리의 대기록은 아닐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우리의 삶에도 새로운 이정표를 찍을 수 있다. 인생의 마라톤 평원을 달려 승전보를 전하자. 다시 뛰자. 이상훈 대전대 교수·대전자치경찰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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