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에도 가장 잊히지 않고 지금도 아쉬움이 있다면 언젠가부터 품고 있던 화가로의 꿈이다. 그림을 처음 그린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당시는 그림이 좋다기보다는 담임 선생님이 방학 때 반 친구 몇 명을 따로 모아놓고 그림 그리기를 지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도화지에 왕자파스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하루는 진한 쑥색으로 밑그림을 칠한 후, 놀이터에서 그네 타는 친구들을 정성껏 그렸는데 선생님께서 굉장히 칭찬해 주셨다. 지금도 그 그림이 또렷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 그림을 같이 배웠던 친구들은 나를 제외하고는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했고, 지금은 각자 그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회에 나오자 바로 미술학원 일반인 강좌에 등록했다. 하지만 내가 꿈꾸던 그림은 더는 그려지지 않았다. 학원 선생님 말씀이 영재도 계속 계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 후 미술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미련이 남아 틈나는 대로 미술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대전에 있는 갤러리는 물론이고 서울 종로구 인사동, 북촌 갤러리는 단골로 다닐 정도였다. 그런 어느 날 미술갤러리에서 관람객으로 자주 뵙던 지인이 그림을 그리면 잘 그릴 거 같다면서 구경만 다니지 말고 그림을 직접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화백인 친구분을 소개해 주셨다. 그 화백은 문화센터에서 일반인을 위한 미술 강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기초가 전혀 없기에 막막했다.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 화백님도 놀라셨던 것 같다. 그곳은 강습생 대부분이 미대 졸업생으로 척척 그렸기 때문이다. 화백님은 유화를 그릴 때 필요한 화구에 대해 남이 말하듯, 그러나 나를 바라보고 준비해 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용 방법을 전혀 모르니 나는 또 화구만 한가득 앞에 놓고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백님이 곧 말씀하실 것 같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나의 유화는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운 나의 스승님! 나는 항상 구석에서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캔버스에 유화를 칠한 첫날, 강습 끝날 무렵 각자 캔버스를 앞에 진열해 놓는데 나는 맨 구석에 보이지 않게 놓았다. 화백님은 외치듯이 말씀하셨다.
"아, 마티스 그림을 보는 것 같다"라고. 나는 뒷자리에서 가만히 휴대폰을 열고 '마티스'를 검색했다. 그는 평면 그림으로도 유명했다. 내 그림은 그릴 줄을 몰라서 원근 없이 평면으로 그려서 유아틱했다. 색상은 손에 닿는 대로 노란색으로 바탕을 칠한 것이 조금 비슷하기는 했다.
그 당시 내 사무실이 3층인데, 5층에 입시생 미술학원이 있다. 한번은 입시생 강사가 내려와서 내 그림을 보더니, 초보자는 기초부터 배우셔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또 화백님께 말씀드렸다. 기초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더라고. 화백님이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내 말만 들으라고. 그렇게 일 년 정도 지나자 약간 자신이 생겼다. 그래서 지난 그림을 고쳐보려고, 창고에 넣어둔 캔버스를 꺼내서 이젤에 얹어놓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다. 화백님께서 합평하실 때마다 내게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화백님, 저에게 늘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고 하셔서요, 1년 전 그림을 꺼내서 고쳐보려고 했는데 도무지 고칠 수가 없습니다."
화백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지금처럼 그리면 천재가 될 수 있다고. 묘사도 못 하는데 어떻게 천재가 되느냐고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화백님은 웃으시기만 했다. 나중에 말씀하시는데 내가 색채에 대해 상당히 표현을 잘한다고, 그러니 다른 부분은 생각지 말고 색채로 표현을 하라고 하셨다. 역시 큰 스승님이셨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쉽지 않은 것이 아니고 어려웠다. 색채로 어떻게 표현을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옛날의 의문을 얼마 전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시 교양반> 강습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쓰고, 그 시에 관한 그림을 그려보라는 숙제를 한 것이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단 두 줄의 시를 적었다. 그리고 그 시에 관한 그림을 크레용으로 표현했는데, 숙제를 내준 강사도 놀랐으니까 말이다. 단 두 줄의 짧은 시로 어쩌면 이렇게 풍성하게 표현했느냐고 탄복하는데, 나는 그 화백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뇌까렸다, "아, 이거였구나."
불현듯 화가로의 꿈을 지금이라도 실현해 보고 싶었다. 화백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다시 한번 메모를 했다.
유화를 배울 당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수강을 미뤘다. 처음에는 한 달, 두 달, 그러다가 한두 해가 지나도 화백님은 늘 그 자리에 계셔서 더욱 마음이 놓였는지도 모른다. 혹 거리를 오가면서 뵙기라도 하면 "그림은 언제 그릴 건가?" 라고, 말씀하시며 빙긋이 웃으셨다.
10여 년이 지나도 늘 뵈었기에 기회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때 다시 시작하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 기회는 더 오지 않았다. 내 재능을 아껴 주시던 화백님께서 몇 년 전 갑자기 작고하셨기에 이젠 그 화백님께 배울 수가 없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때 그 화백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이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내게도 변화가 있다. 함께 살던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 이제는 오롯이 나만을 위해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마음을 굳혔다. 내년부터 다시 해보기로 했다.
10월은 중구문화원에서 '유튜브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2기' 강습이 시작되었다. 동영상 만드는 것을 처음부터 배울량으로 등록 했다. 기초부터 상세히 배울 수 있어서다. 3주 차 강의는 '글그림'을 사용하기 위해 먼저 그림을 그렸다. 내가 그린 그림을 사진 찍어서, 그 위에 글씨를 쓰는 것이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리는 데 마음이 들뜨는 듯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꽃 한 송이조차도 그릴 수가 없었다. 연필로 묘사를 하는데도, 그 묘사도 할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까맣게 잊은 것이다. 항상 마음 속에 간직했던 '화가로의 꿈'은 이제는 지나간 세월일 뿐이다.
"It's too late!" 그 시간을 찾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이 가볍다. 아쉬우면서도 마음이 가볍다. 현재의 나의 모습을 투영해서일까.
민순혜/수필가
민순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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