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뉴고개까지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끌고 올라온 라이더가 돌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도로는 한산했다. 투르 드 프랑스 대회 코스여서인지 차량보다는 사이클이나 오토바이를 타는 라이더들이 더 많았다. 고속도로에서도 오토바이 통행을 허용하는 유럽은 여러 교통수단에 수송 분담률을 나누는 정책을 펴고 있다. 각 나라마다 국토 전역을 잇는 도로 사이클 대회를 개최하고 통과 도시를 관광지로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투르 드 프랑스는 지난 7월 대회가 끝난 지 3개월만인 10월 25일 내년 열릴 제111회 투르 드 프랑스 코스를 일찌감치 생중계로 공개했다. 올해 대회가 스페인에서 시작했다면 내년 코스는 6월 29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코스 공개 방송은 자동차 기업이 야심차게 내놓는 신모델 발표회장처럼 화려했다. 유명 자전거 브랜드는 물론 지원 차량으로 쓰이는 전기자동차와 전기 오토바이 업체, 최신 방송 장비, 유럽의 대형 유통회사, 사이클 프로팀을 운영하는 각 항공사나 기업들이 총출동해 투르 드 프랑스를 협찬하고 있다.
모테산장을 지나친 트레커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세뉴고개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정면 가장 높은 봉우리가 에귀 데 글라시에(Aiguille des Glacier 3815m).(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몽블랑 둘레길의 진수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구간부터 시작돼 내일 오를 몽 드 라 삭스(Mont de la Saxe)인데 아직 갈 길은 멀고 몸이 따라 주지 않으니 걱정이다. 몸 안에서 에너지를 샘솟게 해줄 뭔가가 절실했다. 이래서 운동선수들이 약물의 유혹에 빠지는 모양이다.
스포츠인은 '규칙을 지키고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할 것'을 생명처럼 여기지만 가끔 도핑이라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약물 논란은 강한 체력과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사이클경기에서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1960년 로마올림픽 사이클경기에서 덴마크 선수가 경기 도중 약물복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규제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1966년 세계사이클연맹은 사상 최초로 약물검사를 단행해 다른 종목으로 확산시켰다. 그런데도 88서울올림픽 육상 100m 금메달리스트 벤 존슨, 1990년대 육상 중장거리를 휩쓸었던 중국의 마군단, 구동독에서 남성호르몬을 주입한 여자선수들 등 도핑 사건은 끊이질 않는다. 이 중에서도 사이클의 황제로 불린 랜스 암스트롱 도핑 사건은 역대급 사기사건으로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 출신 랜스 암스트롱(52)은 고환암을 극복한 인간승리자이자 페어플레이어로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그는 1996년 암세포가 뇌와 폐까지 번진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 생명까지 위험한 상황에서 불굴의 정신력으로 치료에 전념해 다음해 완치판정을 받았다. 곧바로 재활에 들어가 선수로 복귀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투르 드 프랑스 사상 첫 7연패라는 위업을 세웠다. 2000년대 초반 그는 모든 스포츠 종목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수에게 주는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다. 암스트롱은 당시 이인자였던 독일의 얀 울리히와 레이스 도중 상대가 넘어진 틈을 타 역전시키지 않고 일어설 때까지 기다린 뒤 정정당당하게 레이스를 펼치는 감동 드라마로 더욱 유명세를 치렀다.
전세계 많은 언론인이 암스트롱의 페어플레이와 휴먼 드라마를 칼럼에 인용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도핑의혹이 불거졌지만, 대중은 믿지 않았다. 결국 압박에 못 이겨 금지약물 복용 사실을 털어놓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선수에게도 약물을 강요하거나 거부하면 자신의 영향력으로 응징했다는 추악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고환암도 금지약물 때문이라는 설까지 돌았다. 그의 모든 수상 기록은 삭제됐고 후원금 반환소송까지 당해야 했다. 이인자 얀 울리히도 도핑이 적발돼 몰락했다.
정신력과 체력(기술)은 비례관계다. 이 관계가 깨지면 유혹에 빠지기 쉽다. 고도의 체력(기술)을 키운다는 건 강한 정신력과 자기 절제가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체력이 멘탈을 지배하고 마인드가 체력을 컨트롤하는 단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도핑테스트 기술도 약진하겠지만 검사를 피해갈 금지약물 개발도 음지에서 계속될 것이다. 승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금 트레킹 중 체력이 고갈돼 멘탈까지 허물어진 우리에게 정체불명의 약물이 뚝 떨어진다면 어떻게 대응할까.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세뉴고개(Col de la Seigne 2516m)를 향해 두 시간쯤 올라갔을까. 일행 중 모녀의 발걸음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다리에 쥐가 나는 모양이다. 나는 비장의 약물(?)을 꺼냈다.
/김형규 여행작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