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뒤 몽블랑을 가다] 8-정신력은 체력을 대체할 수 있을까

  • 문화
  • 여행/축제

[투르 뒤 몽블랑을 가다] 8-정신력은 체력을 대체할 수 있을까

갈길은 먼데 이틀째 잠못 이룬 밤 '어쩌나'
바닥난 체력 일으켜줄 약물의 유혹
'약쟁이' 오명, 승리 강박 스트레스 탓

  • 승인 2023-10-31 11:02
  • 신문게재 2023-11-01 9면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세뉴고개자전거
세뉴고개까지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끌고 올라온 라이더가 돌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치즈팩토리에서의 하룻밤은 우리 일행만 투숙해서인지 전날 로젤레트산장보다 편안했지만, 남녀공용인지라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치즈팩토리는 몽블랑 둘레산 루트에서 벗어나 있다. 다음날 아침 본궤도인 모테산장(Refuge des Mottets)까지 D902번 도로를 따라 8㎞ 정도 차를 타고 이동했다. 모테산장은 코스 최남단인 레 샤피유 마을 동북쪽에 있다.

도로는 한산했다. 투르 드 프랑스 대회 코스여서인지 차량보다는 사이클이나 오토바이를 타는 라이더들이 더 많았다. 고속도로에서도 오토바이 통행을 허용하는 유럽은 여러 교통수단에 수송 분담률을 나누는 정책을 펴고 있다. 각 나라마다 국토 전역을 잇는 도로 사이클 대회를 개최하고 통과 도시를 관광지로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투르 드 프랑스는 지난 7월 대회가 끝난 지 3개월만인 10월 25일 내년 열릴 제111회 투르 드 프랑스 코스를 일찌감치 생중계로 공개했다. 올해 대회가 스페인에서 시작했다면 내년 코스는 6월 29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코스 공개 방송은 자동차 기업이 야심차게 내놓는 신모델 발표회장처럼 화려했다. 유명 자전거 브랜드는 물론 지원 차량으로 쓰이는 전기자동차와 전기 오토바이 업체, 최신 방송 장비, 유럽의 대형 유통회사, 사이클 프로팀을 운영하는 각 항공사나 기업들이 총출동해 투르 드 프랑스를 협찬하고 있다.

에귀데글라시에
모테산장을 지나친 트레커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세뉴고개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정면 가장 높은 봉우리가 에귀 데 글라시에(Aiguille des Glacier 3815m).(사진=김형규 여행작가)
10분 정도 달려 오전 9시쯤 모테 산장 인근에 도착했다. 3일째 목적지는 이탈리아 TMB에서 가장 큰 도시인 쿠르마예르(Courmayeur)다. 지난 이틀간, 특히 전날 강행군한 근육통이 발목과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쿠르마예르에선 좀더 안락한 잠자리가 보장돼 있다는 희망을 부여안고 15㎞를 참고 전진해야 한다.



몽블랑 둘레길의 진수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구간부터 시작돼 내일 오를 몽 드 라 삭스(Mont de la Saxe)인데 아직 갈 길은 멀고 몸이 따라 주지 않으니 걱정이다. 몸 안에서 에너지를 샘솟게 해줄 뭔가가 절실했다. 이래서 운동선수들이 약물의 유혹에 빠지는 모양이다.

스포츠인은 '규칙을 지키고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할 것'을 생명처럼 여기지만 가끔 도핑이라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약물 논란은 강한 체력과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사이클경기에서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1960년 로마올림픽 사이클경기에서 덴마크 선수가 경기 도중 약물복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규제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1966년 세계사이클연맹은 사상 최초로 약물검사를 단행해 다른 종목으로 확산시켰다. 그런데도 88서울올림픽 육상 100m 금메달리스트 벤 존슨, 1990년대 육상 중장거리를 휩쓸었던 중국의 마군단, 구동독에서 남성호르몬을 주입한 여자선수들 등 도핑 사건은 끊이질 않는다. 이 중에서도 사이클의 황제로 불린 랜스 암스트롱 도핑 사건은 역대급 사기사건으로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 출신 랜스 암스트롱(52)은 고환암을 극복한 인간승리자이자 페어플레이어로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그는 1996년 암세포가 뇌와 폐까지 번진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 생명까지 위험한 상황에서 불굴의 정신력으로 치료에 전념해 다음해 완치판정을 받았다. 곧바로 재활에 들어가 선수로 복귀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투르 드 프랑스 사상 첫 7연패라는 위업을 세웠다. 2000년대 초반 그는 모든 스포츠 종목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수에게 주는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다. 암스트롱은 당시 이인자였던 독일의 얀 울리히와 레이스 도중 상대가 넘어진 틈을 타 역전시키지 않고 일어설 때까지 기다린 뒤 정정당당하게 레이스를 펼치는 감동 드라마로 더욱 유명세를 치렀다.

전세계 많은 언론인이 암스트롱의 페어플레이와 휴먼 드라마를 칼럼에 인용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도핑의혹이 불거졌지만, 대중은 믿지 않았다. 결국 압박에 못 이겨 금지약물 복용 사실을 털어놓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선수에게도 약물을 강요하거나 거부하면 자신의 영향력으로 응징했다는 추악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고환암도 금지약물 때문이라는 설까지 돌았다. 그의 모든 수상 기록은 삭제됐고 후원금 반환소송까지 당해야 했다. 이인자 얀 울리히도 도핑이 적발돼 몰락했다.

정신력과 체력(기술)은 비례관계다. 이 관계가 깨지면 유혹에 빠지기 쉽다. 고도의 체력(기술)을 키운다는 건 강한 정신력과 자기 절제가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체력이 멘탈을 지배하고 마인드가 체력을 컨트롤하는 단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도핑테스트 기술도 약진하겠지만 검사를 피해갈 금지약물 개발도 음지에서 계속될 것이다. 승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금 트레킹 중 체력이 고갈돼 멘탈까지 허물어진 우리에게 정체불명의 약물이 뚝 떨어진다면 어떻게 대응할까.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세뉴고개(Col de la Seigne 2516m)를 향해 두 시간쯤 올라갔을까. 일행 중 모녀의 발걸음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다리에 쥐가 나는 모양이다. 나는 비장의 약물(?)을 꺼냈다.

/김형규 여행작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서산 부석사 불상 친견법회, 한일 학술교류 계기로"
  2. 대전 학교 내 성비위 난무하는데… 교사 성 관련 연수는 연 1회 그쳐
  3. [입찰 정보] '테미고개·서대전육교 지하화' 대전도시철도 2호선 트램 12공구 공고
  4. 2023년 대전·세종·충남 전문대·대학·대학원 졸업생 취업률 전년比 하락
  5. ‘달콤해’…까치밥에 빠진 직박구리
  1. [사설] '대한민국 문화도시' 날개 달았다
  2. [사설] 교육 현장 '석면 제로화' 차질 없어야
  3.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대전서 만난다
  4. 한덕수 권한대행도 탄핵… 대통령·국무총리 탄핵 사상 초유
  5. 대전 동구, 축제로 지역 이름 알리고 경제 활성화 기여까지

헤드라인 뉴스


韓 권한대행도 탄핵… 대통령·국무총리 탄핵 사상 초유

韓 권한대행도 탄핵… 대통령·국무총리 탄핵 사상 초유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국무총리가 27일 탄핵 됐다. 대통령에 이어 권한대행마저 직무가 정지되는 헌정 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한 것으로, 순서에 따라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됐다. 국회가 이날 오후 본회의를 열고 무기명 투표를 진행한 결과, ‘국무총리(한덕수) 탄핵 소추안’은 재적의원 300명 중 192명이 참석해 찬성 192표로 가결됐다. 표결에 앞서 우원식 국회의장은 “이 안건은 국무총리 한덕수 탄핵소추안이다. 그러므로 헌법 제65조2항에 따라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밝혔다...

세종시 `주택 특공` 한계...수도권 인구 유입 정체
세종시 '주택 특공' 한계...수도권 인구 유입 정체

현행 세종시 주택 특별공급 제도가 수도권 인구 유입 효과를 확대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해오던 이전 기관 종사자 특별공급 제도가 2021년 5월 전면 폐지되면서다. 문재인 전 정부는 수도권에서 촉발된 투기 논란과 관세평가분류원 특공 사태 등에 직격탄을 맞고, 앞뒤 안 가린 결정으로 성난 민심을 달랬다. 이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를 본 이들이 적잖다. 중앙행정기관에선 행정안전부 등의 공직자들부터 2027년 제도 일몰 시점까지 특별공급권을 가지고 있던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고개를 떨궜다. 세종시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같..

AI 디지털 교과서 논란...전국 시도교육감 엇박자
AI 디지털 교과서 논란...전국 시도교육감 엇박자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 명의의 건의문이 17개 시·도 간 입장 조율 없이 제출돼 일부 지역의 반발을 사고 있다. 최교진 세종시교육감은 12월 26일 이와 관련한 성명을 통해 "우리 교육청은 그동안 AI 디지털 교과서의 현장 도입에 신중한 접근을 요구해왔다. 시범 운영을 거쳐 점진적으로 도입하자는 의견"이라며 "AI 디지털 교과서를 교육자료로 규정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찬성한다"란 입장으로 서두를 건넸다. 이어 12월 24일 교육감협의회 명의의 건의문이 지역 교육계와 협의 없이 국회에 제출된 사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독감과 폐렴 함께 예방해 주세요’ ‘독감과 폐렴 함께 예방해 주세요’

  • ‘달콤해’…까치밥에 빠진 직박구리 ‘달콤해’…까치밥에 빠진 직박구리

  •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대전서 만난다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대전서 만난다

  • 즐거운 성탄절 즐거운 성탄절